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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r 08. 2024

2. 유진이가 내 인생에 파이(π)를 곱했다.

π의 세계와 만나다.

   

3교시 영어 시간이었다. 4월의 따스한 햇살이 왼쪽으로 난 창을 통해 교실 안으로 가득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무심코 옆을 보니 유진이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아도 계속 노려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그렇게 어색하게 시선을 교환하고 있는데 선생님이 내 이름을 불렀다.     


“현주야.”     


“네. 선생님.”     


“일어나서 지금 배운 데 읽어 볼래?”     


“네. 선생님”     


그렇게 유진이와 어색하게 마주친 시선을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었다.      


영어 선생님은 나를 처음부터 무척 귀여워하셨다. 1학년 1학기에 생전 처음 배우기 시작한 영어가 무척 재미있었다. 그래서 영어 과목을 특히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다른 과목도 성적이 좋았지만, 영어 성적은 중간시험 때 특히 뛰어났다. 그런 나를 선생님이 귀여워하신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유진이도 영어를 잘했지만, 중간시험에서 나와 같이 100점을 맞지 못했다. 그러나 영어 선생님은 반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적을 번호 순서대로 교단에 서서 큰 소리로 불러주셨다. 나와 키가 비슷한 유진이가 내 바로 앞번호였다.   

  

“채유진 95점, 전현주 100점, ...”     


선생님이 모든 학생의 성적을 불러주고 난 뒤 다시 말씀을 이어갔다.     


“역시 현주구나. 수업 시간에도 참 잘하더니. 얘들아. 너희도 현주처럼 열심히 해. 알았지?”   

  

사실 나는 영어 선생님에게 첫눈에 반했었다. 엄마를 따라 함께 다니던 교회에서 남자는 모두 악마라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지만, 나를 귀여워하는 영어 선생님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 더욱 열심히 영어 공부를 한 것이다. 영어 외에 다른 과목에서도 나는 유진이를 앞섰다. 그런데 유진이가 나를 미워한 것은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진이는 단 한 번도 나를 직접 해코지하지는 않았다. 그저 멀리서 노려보고, 친구들 사이에서 나에 관한 악소문을 지속적으로 퍼뜨리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유진이와 늘 동선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반장이고 그 아이는 부반장이었기 때문이다. 학급 회의를 열 때도 유진이는 바로 내 옆에 있었고, 그 아이를 바라보지는 않았지만, 그의 시선, 보이진 않는 눈길을 나는 늘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수학 시험 시간이었다. 뒤에서부터 시험지를 걷어 나오기 시작하면서 내 답안지에 원주율을 표기하는 π(파이)를 깜박하고 안 쓴 것이 생각나서 무심히 적어 넣었다. 그것을 놓치지 않은 유진이가 감독으로 들어온 미술 선생님에게 내가 부정행위를 했다고 ‘고발’한 것이다.     


“선생님. 현주가 부정행위를 했어요. 시험이 끝났는데 남의 답을 보고 몰래 답을 썼어요.”    

 

선생님이 물었다.     


“사실이니 현주야?”     


“네. 쓰기는 했지만, 남의 것을 보고 한 것은 아녜요.”     


“왜 그랬지?”     


“그냥 문제없을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한 건데요.”     


“일단 수업이 끝나고 나중에 교무실로 와라.”  

   

내가 미술에 뛰어났기에 미술 선생님도 나를 귀여워했다. 그래서 별 탈이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시작된 사달은 교장 선생님까지 교사 회의를 개최하는 큰 소동이 되어 버렸다. 물론 여기에서 유진이와 그 부모가 학교에 와서 적극 항의하면서 문제가 더 커진 것이기도 하였다. 결국 엄마가 학교에 와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겨우 무마되었다. 반장까지 하는 모범생이 실수한 것이라고 적극 나를 옹호한 영어 선생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마무리된 줄 알았던 ‘π 문제’는 나의 인생 전체를 통해 늘 나를 괴롭힌 고난이 시작된다는 사인이 되었다. 마치 π를 숫자로 표기하면 무한소수가 되어 3.1415926535897932384626433...로 무한히 이어지듯이 그 이후 내 인생은 끝없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유진이는 2학년 때도 같은 반이 되어 나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며 괴롭혔지만, 나중에 내 인생에서 벌어진 일에 비하면 그것은 그저 작은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나중에 대학교에 가서 사귄 애인이 경상도 사투리로 한 말대로였다.      


“에이, 그기 파이다 마...”     


그렇다 내 인생이 파이가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런 나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엄마와 함께 다니던 교회 성가대에서 부르는 노래였다.     

 

청량리 시립대 앞에 있는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서, 신자들과 함께 언덕을 내려오던 5월 하순의 어느 날 저녁이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결에 실려 매우 강한 향기가 내 몸 주위로 퍼졌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향기였다. 처음에는 아카시아 향기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계속 향기를 맡으며 생각해 보니 아카시아에 백합과 박하를 더한 향기였다. 주변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카시아나 백합은 없었다. 같이 내려오던 신자들에게 물었더니 아무 냄새도 안 난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들으니 내가 다니던 교회의 ‘하나님’께서 그때 시립대 쪽에 있는 교회를 향해 강복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향기는 그 후에도 ‘하나님’을 모시고 거행한 교회 집회가 있을 때마다 내 코끝을 스치곤 했다.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다른 사람이 아무리 사이비 종교라고 욕을 하고 악한 교주라고 해도 나는 나의 교회와 나의 ‘하느님’을 더욱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나의 신앙심을 더욱 굳건하게 해주는 든든한 버팀목은 바로 엄마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서 내 나이 서른이 될 때까지 꼭 붙어살다가, 세속을 떠나 함께 신앙의 마을로 들어가 천국을 향한 계단으로 걸어가자고 약속한 그 엄마가 나의 인생에서 가장 큰 시련을 주는 존재가 될 줄은 정말로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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