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Apr 28. 2024
10. 우유부단한 남편의 선택
부부의 인연은 결국 운명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 사실상 고아가 된 내가 기댈 사람은 지금의 남편밖에 없었다. 양가에서 서로 반대한 우리가 결혼을 결심하게 된 것도 결국 운명이었다. 엄마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결혼은 고사하고 더 이상 사귀는 일도 어려웠을 것이다. 남편은 그런 사람이었다. 모든 것에서 주체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이끌고 가는 과감성이 전혀 없었다. 그런 사람과의 결혼은 사실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남편이 결단을 내린 것도 있었다. 가장 반대가 심한 시어머니도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를 돌보아야 한다는 아들의 선언을 막지는 못했던 것이다. 우유부단한 남편에게 무슨 용기가 생긴 것일까? 나중에 물어보니 남편은 나를 악의 세력에서 구해내겠다는 장한 결심을 한 것이었다. 나는 나의 ‘과거’를 남편에게 다 이야기했다. 그러자 신앙심이 깊은 남편은 신앙마을의 사건이 내게 깊은 우울증과 세상에 대한 혐오를 심어주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교주를 지칭할 때마다 여전히 ‘그분께서’라는 호칭을 붙이는 내 말투를 근거로 내가 아직 그 나쁜 종교의 나쁜 영에 물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결혼을 결심하는 데 나쁜 영과의 대결을 근거로 드는 남자는 세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 남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대결은 생각 밖으로 오래 진행되고 우리의 결혼 생활을 극한 상황까지 몰아갔다. 과연 그러한 선악의 대결이라는 남편의 판단이 옳았는지 나는 아직도 확신이 없다. 그러나 남편은 그렇게 믿으며 결혼 생활을 지속했고 그와 살아가면서 나의 우울증과 세상에 대한 혐오가 어느 정도 완화된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남편은 나를 완전히 치유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의 잘못은 아니다. 내 병이 너무 깊어서 그의 ‘순진한’ 생각으로는 처음부터 치유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병은 나만이 알고 있는 꿈에서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중학교 때 꾼 꿈이 나를 괴롭힌 유진이와 관련된 것만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꿈은 남편에게도 이야기한 적이 없다. 중학교 입학한 지 한 달쯤 되었을까? 첫 시험을 잘 보기 위해 나는 밤 1시가 넘을 때까지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설핏 잠이 들었다. 꿈을 꾸었다. 아주 크고 검은 사람, 아니 악마와 같은 존재가 나타나 느닷없이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 귀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너를 죽이고 말겠어. 너는 불행해야 해.”
숨이 막히고 정신이 아뜩해졌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아빠는 잠들어 있었다. 엄마는 다른 곳을 바라보느라고 내가 어떤 상태에 놓인 것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나는 혼자였다. 그렇게 깊은 구렁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몸부림치면서 꿈에서 깨어났다. 그때 이미 엄마와 각방을 쓰던 아빠는 건넛방에서 고른 숨소리를 내면서 자고 있었다. 내 곁에서 누워 있던 엄마는 어린 동생을 옆에 두고 평화로운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창밖으로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의 소음과 불빛이 불규칙적으로 방의 벽에 반사되었다. 나는 혼자였다. 아무도 나를 돌보지 않았다. 나는 극심한 공포에 떨고 있었지만, 나의 식구들은 지극히 평화롭게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 모순적 상황이 나는 이해가 안 되었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구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 말이다. 그런데 악마가 내 목을 조르던 꿈은 나중에 생각할 때 유진이가 내 앞에서 계속 철문을 닫던 꿈보다는 덜 무서웠다. 그 악마를 물리칠 존재가 어딘가 있다는 막연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존재도 이미 내 꿈에 나타났었다.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때였다. 어느 날 꿈에 '예수'가 나타났다. 갈색 눈동자에 긴 갈색 머리카락을 한 30대 남자였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저 나를 계속 한 없이 자비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나는 무한한 위안을 느꼈다. 그가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그 당시에는 예수라는 존재를 몰랐다. 나중에 엄마에게 말하니 내게 예수라고 말해주어서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나중에 내가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예수, 또는 수호천사가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악마 꿈과 유진이가 계속 닫은 철문 꿈을 꾼 이후 그런 기대감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현실도 점점 더 깊은 고통의 늪으로 빠져드는 느낌만 드는 일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살다가 만난 남편이 내게 구원의 열쇠가 되기를 기대한 것이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 착했다. 내가 만난 많은 남자 가운데 가장 착한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착한 남자의 기준은 세 가지였다. 첫째 변함없이 내게 잘해주어야 한다. 둘째 강퍅함이 전혀 없어야 한다. 셋째 자기의 것을 아낌없이 내주어야 한다. 이 세 조건에 그는 완벽하게 부합했다.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계속, 주저하지 않고 다 들어주었다. 나와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인데 나를 위해서 그리 헌신적으로 뭐든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기대하는 바가 점점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착한 남자였다는 사실이었다. 부모 형제만이 아니라 동료, 친구, 하다못해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착한 행동을 하고야 마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그는 에고를 내려놓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해주는 태도는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제대로 살기에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불안이 공존했다. 나는 나만을 위해 헌신하는 남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악을 선으로 이긴다는 그의 신념은 그의 모든 다른 단점을 가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외양은 내가 꿈에서 본 남편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했다. 안경을 쓴 공부밖에 모를 것 같은 얼굴, 약간 왜소한 체구, 그리고 진리를 탐구하고 싶어 하는 순수한 마음. 내가 꿈에서 본 그 남자가 분명했다.
남편과 나는 혼인 신고부터 하고 결혼식 준비를 했다. 시간강사로만은 벌이가 시원치 않자, 그는 연구소에 취직했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안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혼식은 매우 간소하게 치렀다. 시댁에서는 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하고 온 아들이라 기대가 컸지만, 우리 둘이 한사코 반대해서 친인척과 친지 몇 명만 초대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내 쪽에서는 부모가 다 돌아가시고 동생도 군에 있어서 아무도 오지 않았다. 물론 엄마 쪽의 친척이 있었지만, 엄마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유언장에 구체적으로 밝힌 '그들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나는 철저히 지켰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이 엄마가 돌아가시고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 얼마 안 되는 엄마의 유산을 노리는 모습을 보고 정이 떨어져서 의절하게 된 것도 있었다.
그래서 결혼식 준비는 내가 혼자 다 했다. 식장은 남편의 종교에 따라 성당을 잡았다. 그리고 남편의 종교 절차에 따라 관면혼을 치렀다. 내가 나중에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조건으로 혼인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나는 가톨릭 종교를 처음부터 싫어했다. 그리고 남편의 권유로 예비자 교리를 받았지만 결국 세례 성사가 거행되기 하루 전날에 포기했다. 신앙마을에서 악마의 종교라고 배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신혼집은 분당에 마련했다. 남자와 만나는 것조차도 죄악으로 여기는 신앙마을의 교리를 배운 내가 결혼하게 될 줄은 사실 나도 몰랐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그런 모든 확신과 편견과 부정성을 다 무너뜨린 최초의 남자였다. 내가 만난 다른 모든 남자에 비해 지극히 평범하고 지극히 유약하고 지극히 우유부단한 남자였는데 나의 견고한 성을 뚫고 들어온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의사나 변호사, 준재벌집 남자들이 결혼하자고 해도 마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는데 이 평범하고 유약하기 그지없는 남자가 나를 ‘정복’한 것이다.
사실 나는 남편에 대한 꿈에도 불구하고 늘 강한 남자를 바랐다. 나를 힘든 삶의 질곡에서 구해낼 예수와 같은 존재, 아니 전지전능한 신적인 영웅을 바랐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남편은 정 반대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남편에게 끌린 것이다. 결국 운명이었다. 나의 끝없는 고통의 삶이 이어지려고 그리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남편과 결혼했지만, 나의 우울증과 세상에 대한 혐오는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물론 대학교 때부터 먹어온 우울증 약은 더 이상 복용할 필요는 없어졌다. 남편의 헌신적인 배려가 나의 마음을 어느 정도 안정시켰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도 계속했다. 분명히 결혼 전 혼자 있을 때보다는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 그러나 그 안정이 깨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아이를 낳는 것을 미루었다. 남편은 우리가 나이도 있어서 하루라도 빨리 아이를 가지기를 바랐지만 나는 전혀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신혼 초부터 남편은 지속적으로 아이를 원했다. 남편의 생각으로는 아이가 생기면 호르몬의 변화가 와서 내가 정신적으로 더 안정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어쩐지 아이를 기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이 사는 것이 좋았다. 우리 사이에 누군가 개입되는 것이 싫었다. 무엇보다 남편의 주의를 빼앗기는 것이 싫었다. 비록 그것이 우리의 아이라고 해도 말이다. 뭔가 집히거나 확신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그냥 그런 막연한 느낌이 늘 내 등줄기를 타고 다녔다. 그리고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고 육아하는 과정에서 그런 내 느낌이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때는 너무 늦은 후였다.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결국 착한 남편의 설득에 굴복하였고 나는 임신을 했다. 임신 기간 내내 나는 열심히 기도하고 태교에 최선을 다했다. 내 막연한 예감이 틀리기를 바라면서 간절히 출산과 양육이 내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바람이었다. 출산 때부터 나는 지옥을 맛보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