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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y 05. 2024

12. 낮에 아이와 둘만 있는 집

육아는 내게 지옥문을 열어주었다.

산후조리원에는 일주일만 있었다. 무엇보다 돈 감당이 안 되기도 했지만, 결벽증이 심한 내가 그곳에 머무는 내내 불편했다. 차라리 집에 빨리 가서 내 맘대로 하면서 있고 싶었다. 필로티식으로 지어진 지하 주차장에 내려오니 초겨울의 매서운 바람이 온몸을 휘감았다. 몸이 휘청거렸다. 아이를 안고 있던 남편도 제대로 걷지 못할 정도였다. 일기예보대로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남편이 아이를 뒷자리에 먼저 누이고 나를 부축해서 뒷자리에 앉혔다.     


집은 보일러를 미리 틀어 놓아 훈훈했다. 남편이 안방에 미리 정리해 놓은 아기 침대에 큰딸을 눕혔다. 침대도 미리 온수 매트를 틀어 놓아 따스했다. 산후조리원에서는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역시 내 집이 좋았다. 맘이 갑자기 풀어지면서 잠이 몰려왔다. 아기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남편은 주방으로 향했다. 미역국을 끓이겠단다. 유학 시절 해본 요리라고는 피자와 스파게티밖에 없다고 ‘자랑’한 남편이 끓일 수 있을까? 그런 걱정을 하는 데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 시간 정도 잠들었나? 갑자기 아기의 울음소리가 안방을 가득 울렸다.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서 아기 침대로 가보니 얼굴이 빨개져서 울어댄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 날카로워 신경이 곤두섰다. 남편이 달려와 아이를 안아 올린다.   

   

“배가 고픈 거 아냐?”     


“그런가?”     


마침 젖이 불어 있었다. 계속 울어대는 아기 입에 젖꼭지를 대주니 바로 울음을 그치고 젖을 빨기 시작한다. 열흘 되었지만, 아직 얼굴의 색깔이 붉다. 언제나 ‘살색’이 올라올까? 아니면 너무 울어대어서 붉어진 것인가? 그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젖을 빠는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여전히 낯설다. 이 아이가 누군지 모르겠다. 내가 이름도 짓고 사주도 뽑아본 그 아이가 맞는가 싶다. 젖을 넉넉히 빨았는지 아이가 이내 잠이 들었다. 남편이 이제 미역국을 먹으라면서 국그릇 가득 담아서 안방으로 가져온다. 방에서 음식 냄새나는 것을 질색하는 나는 애를 내려놓고 식탁으로 걸어갔다. 미역국 국물이 갈색이 돈다. 남편에게 물어보니 견과류가 좋다는 이야기를 온라인에서 보고 호두와 잣 그리고 아몬드를 갈아 넣고 끓였단다. 한 수저 떠 입에 넣어보니 보기보다 맛이 있다. 남편이 평생 처음 끓였다는 것치고는 나쁘지 않다.   

  

다음날 남편이 일주일 출산 휴가와  월차 그리고 주말을 합쳐 모두 열흘 만에 다시 연구소로 출근했다. 이제 식구가 늘었으니, 돈도 더 벌어야 할 일이다. 나는 출산 한 달 전에 직장을 그만둔 차이니 더욱 신경이 쓰일 노릇이었다. 내가 모시던 의사는 몸이 회복되면 다시 출근하라고 했지만 나는 이제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의사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먼 훗날 그 표정의 의미를 알게 될 때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잠이 계속 와서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남편이 출근했다. 눈을 떠보니 10시 15분이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니 아이와 둘만 큰 집에 덩그러니 남았다. 아이가 추울 것 같아서 보일러 온도를 더 올렸다. 거실 창밖은 온통 설국이었다. 도로의 눈은 어느 정도 녹았지만, 길 건너편의 햇살이 쏟아져 내리는 산은 온통 흰빛으로 찬란히 빛났다. 그 경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아이가 또 발작적으로 울어대기 시작한다. 급히 달려가 안아 올려 젖꼭지를 물렸다. 이내 젖을 힘차게 빨아대기 시작한다. 너무 젖이 많이 나와 입 주위로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여전히 낯설다.     


“넌 누구니? 왜 나에게 왔니?”     


물론 아이는 대답이 없다. 그저 열심히 젖을 빨아댄다. 그렇게 양껏 젖을 먹고 난 아이를 아기 침대에 누이니 잠들었다. 이불을 덮어주고 거실로 나와 해바라기를 하려고 옷을 벗고 창가로 갔다. 햇살이 따끈하게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흘렀나? 아기가 또 자지러지게 운다. 달려가 보니 속싸개 속에 고치처럼 있으면서 몸을 바르작대려는 모습이다. 속싸개를 벗기고 기저귀를 만져보니 묵직하다. 쉬만 한 것이 아니라 응가도 한 무더기 했다. 물티슈로 닦아주고 새 기저귀를 채우니 다시 조용해진다.     


지난밤에도 서너 번 울어댔다. 나는 도저히 눈이 안 뜨여 그때마다 남편이 일어나 우유를 타 주었다. 아이를 위해 일반 분유보다 두 배 비싼 산양 분유를 먹였다. 새벽 네 시 무렵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나 보니 남편이 아기 침대 옆에서 쪼그리고 잠들어 있었다. 아이 기르는 일이 이런 것인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 루틴이 반복되면서 석 달 정도 흘렀다. 백일잔치를 했다. 왜 하는지는 몰랐지만, 남들이 다 하고 더구나 시댁 식구가 백일잔치에 온다고 하니 준비를 했다.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그런 날은 챙겨야 한다고 여긴 모양이다. 그동안 밤에 제대로 잠을 자본 적이 없어서 몸이 만신창이가 된 느낌이 들었다. 소화기관이 엉망이 된 것이 분명했다. 이제 자꾸 매달리는 아이를 한 손으로 들고 김치 쪼가리에 맨밥을 물에 말아먹는 둥 마는 둥 하는 날이 이어졌다. 저녁에 남편이 퇴근하기만 기다리다가 문소리가 나면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침대로 들어갔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 시집 식구가 몰려왔다.     


제대로 한다고 수수팥떡과 백설기를 주문했다. 집 청소도 했다. 워낙 깔끔한 체를 하는 성격이라 구석구석을 다 닦았다. 그러고 보니 출산 이후 집 대청소를 한 적이 없다. 남편이 열심히 하지만 언제나처럼 내 성에 안 찼다. 백일잔치가 끝나고 난 다음 날 아침에 몸의 느낌이 이상했다. 구역질이 계속 나고 어지러웠다. 게다가 알 수 없는 공포가 몰려왔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어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났다. 그러나 일어날 수가 없었다. 겨우 일어났는가 싶더니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자 아이도 자지러지게 울기 시작했다. 그래도 주방으로 기어가 평소에 먹던 신경안정제 자낙스 한 알을 먹고 바닥에 누웠다. 눈을 떠보니 아직도 방이 빙빙 돌아간다. 다시 눈을 감고 잠시 쉬다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119 불러줘.”     


그러고 나서는 침대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아기 침대 옆 방바닥에 누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남편과 119 구조대원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119차에 나와 함께 탔다. 분당서울대병원을 향했다. 응급실에 실려 갔다. 이제 어지럼증은 사라졌다. 걸을 만했다. 담당 의사가 내게 이런저런 질문을 한다. 그때 남편이 다가와 말을 걸자, 의사가 신경질적으로 남편보고 저리 가라고 한다. 남편이 멀어지자, 의사가 질문을 이어간다.     


“몸이 어디가 아프죠?”     


“갑자기 공포가 밀려와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남편이 때렸나요?”     


뜬금없는 질문이다. 남편은 나의 종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무슨 말인가 싶었다. 지금까지 내게 단 한 번도 언짢은 말 한마디도 안 한 사람인데. 그래서 대답했다.     


“아뇨. 아마 공황 반응인 거 같아요. 제가 정신과 치료를 오래 받았는데 한동안 약을 안 먹었어요. 제가 정신과에서 간호사로 일했기 때문에 이게 뭔지 대충 알 거 같아요.”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남편분을 불러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그 의사가 남편과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더니 입원 절차를 밟자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우울증 치료가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를 담당한 의사의 이름은 최혜원이었다.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이때부터 시작된 정신과 치료는 그 의사가 다른 병원으로 이직할 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치료 덕분에 나는 살아났다.


나는 기질적으로 육체적으로 피로해지면 우울해지고 더 심해지면 공황 반응이 오곤 했다. 그러나 엄마 돌아가시고 신혼 기간에는 약을 먹지 않아도 견딜 만했다. 그런데 방심한 데다가 육아로 지치면서 재발한 것 같았다.


최 의사는 우리 가족 모두 치료를 받는 것이 좋다고 해서 남편도 상담 치료 때 늘 함께했다. 그러다가 아예 남편이 3개월 육아 휴직을 했다. 그동안 남편이 아이를 전적으로 보살폈다. 밤에 서너 번 깰 때도 남편이 따로 아이와 자면서 산양 우유를 타 주었다. 밤에 잠을 잘 자게 되니 몸도 다시 좋아졌다 그 치료 과정이 이어지던 어느 날 최 의사가 내게 담담하게 말했다.    

 

“좋은 엄마가 되려고 애쓰지 마세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 나는 애초부터 아이를 잘 기를 육체적, 정신적 힘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이에 맞추어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왔던 것이다. 실제로는 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내 생각과 현실의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괴리를 인지한 나의 강박관념이 결국 공황 반응으로 드러난 것이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문자 그대로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고, 결혼 후에도 남편이 허드렛일을 다 도맡아 했지만,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그래서 잘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만 있을 뿐 제대로 육아를 잘 못 한다는 죄책감과 좌절감이 쌓이다가 마침내 폭발하고 만 것이다.     


정기적인 상담과 약물치료가 1년 넘게 진행되었다. 나의 상태는 매우 호전되었다. 그동안 돌잔치도 무사히 해냈다. 시댁 식구만이 아니라 친척도 와서 아이의 돌을 축하해 주었다. 그런데 내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다. 아이는 여전히 내 젖가슴에 매달렸다. 남편은 세미나와 논문발표 세션이 늘어나 집에 늦게 오는 날이 많았다. 결국 아이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내 몫이었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몸과 맘이 파김치가 되었다.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구원의 복음으로 들릴 정도가 되었다. 퇴근하자마자 남편에게 아이를 맡기고 나는 안방으로 도망쳤다. 그러지 않고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보내는 동안 내 맘 한구석에서 시댁에 대한 원한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내가 이 고생을 하는데 왜 들여다보지도 않고 힘들지 않냐고 말 한마디도 없는가 말이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나를 이렇게 내팽개치는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마다 분노발작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분노를 퍼붓는 대상은 남편이었다. 시댁은 결국 남편의 가족이니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게 우리 가족의 위기가 점점 더 고조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임계점에 이르게 되었다. 아이가 지옥문을 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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