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Francis Lee
May 13. 2024
13. 시댁과의 악연
결국 나의 운명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도대체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그리했다는 말인가? 시댁의 가장 사랑스러운 장남과 결혼한 죄 밖에 없는데 말이다. 친정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하는 처지이고, 그렇게 도움 없이 아이 기르는 것이 만만치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을 것인데 내가 아이를 혼자 기르는 고생을 해도 시집에서는 별 위로와 도움이 없었다. 그저 백일과 돌잔치에 잠깐 와 본 것 말고는 말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분명히 이유가 있었다. 딸들의 아이를 돌보아야 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은 이미 커서 학교에 다니고 있지 않은가? 나는 이제 1살 된 아이를 기르고 있다. 누가 더 도움이 필요할지는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이토록 무심하다니 도대체 알 수 없었다. 엄마가 살아계시면 이 정도 ‘대접’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갑자기 서러움이 몰려왔다. 결국 부모 없는 며느리는 이런 식으로 대해도 좋다는 말인가? 나를 이렇게 무시하다니 견디기 힘든 모멸감이 몰려왔다.
돌잔치가 끝난 지 몇 달 지나면서 잘 걷고 옹알이도 많이 하는 아이가 더 버거워졌다. 도대체 너는 왜 엄마를 이리도 괴롭히기만 한다는 말인가? 남편이 출근하고 텅 빈 집에서 아이와 둘이서만 하루 종일 버티는 것이 점점 더 심한 고통으로 다가왔다. 남편은 그런 나의 불평을 듣고는 퇴근하자마자 회식도 모임도 다 마다하고 집으로 달려왔다. 남편이 현관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바로 문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아이를 그의 품에 안겨주고는 바로 안방으로 달려왔다. 그러지 않으면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머리에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강퍅한 시모의 얼굴이었다. 증오스럽다기보다는 무서웠다. 나를 왜 이리 방치하는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미울 수는 있겠지만 왜 자기의 손녀인 아이까지 무관심으로 대한다는 말인가?
만만한 남편에게 따지고 들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저 물러터지기만 하고 우유부단한 남편은 내가 시모에 대해 불평해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남편은 저녁을 먹고 나서 아이를 안고 컴퓨터 앞으로 갔다. 다음 학회에서 발표할 논문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피곤해하는 데도 나를 위로할 생각이 없었다. 하루 종일 아이와 씨름하느라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나를 달래 줄 사람이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또 공황 발작 전조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낙스 한 알을 먹었다. 30분쯤 지나자, 긴장이 풀리고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잠깐 잠이 들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시모가 우리 집에 왔다. 그것도 다 늦은 저녁에 말이다. 속으로는 기가 막혔지만 내색하지 않고 정중하게 맞이하였다. 그런데 서재에 아이와 있을 남편의 기색이 없다. 그래서 거실로 모시고 와서 차와 케이크를 준비했다. 그런데 갑자기 거실에서 큰 소리가 났다. 놀라서 달려가 보니 시모가 바닥에 쓰러져 엎어져 있었다. 그래서 시모를 안아 일으키는데 너무 무거워 잘 들 수가 없었다. 억지로 들어 올려 겨우 소파에 기대게 하는 데 시모의 얼굴이 괴물로 변해 있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처럼 여러 마리의 뱀이 되어 나를 물어뜯으려고 했다. 그러자 시누도 나타나 나에게 덤빈다. 너무 놀라 소리를 지르는데 목소리가 안 나온다. 그래서 안방으로 도망치려고 달려가는 데 발이 안 떨어진다. 그래서 있는 힘껏 남편을 불렀다.
남편이 달려와 나를 깨웠다.
“무슨 일이야?”
“뭐가 무슨 일이야?”
“소리를 질렀잖아. 놀랐잖아.”
그렇다, 꿈이었다. 나는 안방에 누워 잠이 들었던 것이다. 남편은 아이를 안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몇 시야?”
“새벽 한 시 넘었어.”
5시간을 내리 잤다는 말이다. 아이가 갑자기 보채기 시작한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들을 때마다 너무 소름이 끼친다. 남편이 급히 주방으로 나간다. 보나 마나 ‘아빠 맘마’를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산양 분유에 맛이든 아이는 다른 분유를 절대 안 먹었다. 다른 분유를 타 주면 거부하고 ‘아빠 맘마’를 찾았다. 그리고 그 분유는 반드시 아빠가 타 주었기에 아빠 맘마로 불렀다. 분유를 다 먹고 아이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러자 남편이 비로소 아이를 아기 침대에 눕힌다.
“여보 자야지.”
“아냐 글이 아직 마무리 안 되었어. 먼저 자.”
그러고 남편은 다시 서재로 건너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꿈이다. 비록 시모가 원망스러웠지만 증오하지는 않았는데 왜 그런 꿈을 꾼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다음날 예약된 대로 분당서울대병원 정신과의 최 의사를 만나러 갔다. 꿈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데 나의 예상과는 달리 의사는 별 반응이 없다.
“약은 잘 들고 계시나요?”
“아뇨 상태가 나아지는 것 같아서 지난주에는 안 먹었어요.”
“반드시 복용하세요. 약물의 농도가 낮아지면 다시 불안해질 수 있으니까요.”
사실 자낙스는 필요할 때마다 먹었지만 데파코트는 이미 몇 달 동안 안 먹고 있었다. 막으면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 들고 기분이 오히려 더 저조해졌다. 자낙스와는 효과가 너무 달랐다. 그러나 의사에게는 거짓말을 했다. 잔소리 듣는 것이 지겨웠기 때문이다. 나도 간호사이고 정신과에서 오래 근무했기에 약물에 대한 지식은 나름대로 많은데 나의 상황을 정확히 모르는 사람의 참견이 견디기 힘들었다.
최 의사가 나와의 상담을 마무리하고는 남편과의 대화를 시작했다.
“남편분은 어떠세요?”
“뭐가요?”
“요즘 기분이나 몸의 상태가요.”
“아, 이이가 밤에 자주 깨서 잠이 늘 부족합니다. 그것 말고는...”
그러더니 남편이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을 이어간다.
“사실 여기 병원에 다니면서 제가 힐링되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자 최 의사가 기다렸다는 듯이 답을 한다.
“그러신 거 같아요. 처음에 뵀을 때보다 훨씬 안정되어 보이세요.”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다 선생님 덕분입니다. 보통 상담을 이렇게 길게 하는 줄 몰랐는데 저도 덩달아 상담하게 되어 그런 것 같습니다.”
“네 사실 이 가족의 경우 통상적인 것보다 두 배 정도 시간을 들이고 있습니다. 저도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이 가는 케이스라서 그런가 봐요.”
둘이 대화하는 것을 지켜보니 뭔가 기분이 묘하다. 정작 아픈 사람은 나인데 둘이서 뭐 하는 짓인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날도 상담이 거의 한 시간이나 흘렀다. 상담실을 나오면서 보니 우리 다음에 들어가는 환자의 얼굴이 강퍅해져 있었다. 기다리기에 지쳤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나는 특별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이니 그 정도 기다리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집에 돌아오면서 남편에게 물었다.
“도대체 자기 엄마는 왜 우리 애를 이렇게 미워하는 거야?”
“미워하지 않아. 시간이 없어서 그래.”
“시누 애들은 이미 다 컸잖아, 도대체 뭘 더 돌봐준다는 말이야?”
“그쪽에도 사정이 있겠지.”
늘 똑같은 대화다. 남편은 물러 터져서 나의 심각성을 도저히 모르고 있다. 아니 남편만이 아니라 세상이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아무도 모르고 있다. 내 생각에는 남편이 아직 시간강사인 것이 큰 문제였다. 남편이 교수가 된다면 우리를 이렇게 무시할 리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남편은 교수 자리에 응모할 때마다 번번이 낙방했다. 사실 연구소와 시간강사의 월급으로는 외벌이 생활로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빨리 교수 자리가 나야 하는데 영 전망이 안 보였다. 그래서 나는 더욱 불안해졌다. 이렇게 몸과 맘이 힘든데 경제적 문제까지 닥치게 된다면 남은 것은 절망뿐이었다.
우리의 경제 사정이 뻔한 데도 시집은 그에도 무관심했다. 물론 재벌 집은 아니지만 이제는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운 것도 아닌데 우리 사정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이 집의 희망이자 기둥인 큰아들이 저렇게 애쓰고 있는데 이토록 방치하다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내 꿈에 나타난 대로 시모가 큰아들을 사랑하는 척하지만, 그 본질은 메두사와 같은 존재가 아닐까? 아들이 출세해서 그 보답을 받자고 했으나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나타나 채가 버려 분노하게 된 것이라서 내가 차라리 돌이 되기를 바란 것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일단 결혼했고 아이도 낳았으니, 이제는 맘을 풀고 나를 받아들여야 마땅한 일 아닌가? 그래서 시모에 대해 불평하면 남편의 반응은 늘 똑같았다. 엄마가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했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시모 칠순 잔치가 열렸다. 흔히 하듯이 음식점을 빌려 진행되었다. 나도 오랜만에 미장원에 가서 한껏 모양을 냈다. 아이도 최대한 귀티 나는 옷을 사 입혔다. 누구에게도 지기 싫었다. 시댁 식구와 친척이 모인 자리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시모는 시누이 아이만 안고 있었다. 우리 애는 찬밥이었다. 속이 상했지만, 큰며느리 자리니 뭐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를 잠깐 남편에게 맡기고 화장실을 다녀왔다. 웬일로 시모가 그사이 우리 애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자지러지게 운다. 시모가 퉁명스럽게 한 마디 한다.
“애가 왜 이러냐?”
사진을 열심히 찍어대던 남편이 답을 한다.
“이리 주세요.”
남편이 안아도 애가 울음을 그치지 않는다. 그러자 시모가 한마디 한다.
“애가 누굴 닮아 저리 고집이 세지?”
누굴 닮았을까? 당신 아들을 닮았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아이를 남편에게 건네받아 안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도 아이가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이 울음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다. 나는 도대체 왜 아이 울음소리가 이리 싫은지 모르겠다. 그러나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이를 흔들면서 그만 울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왼팔 옷이 올라갔는데 팔을 보니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아 그래서 울었구나.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이것은 분명히 시모의 짓이었다.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거 봐. 자기 엄마가 애를 이렇게 했어.”
남편이 놀란 눈으로 멍든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마디 한다.
“에이 엄마가 그럴 리가 있나. 어디 부딪친 거야.”
그러면서 아이를 내게서 받아서 다시 안는다. 그러자 아이가 울음을 멈춘다. 나는 기가 막혀 다시 따졌다.
“아니 그럼 당신은 내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당신이 피해망상적으로 사고하는 거야. 자주 그러잖아.”
뭐라고? 내가 정신병자라도 된다는 말인가? 기가 막혔지만, 잔칫집에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기분은 나빴지만 참고 잔치가 끝날 때까지 버티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이었다. 아이가 그 정도 멍이 들었으면 멱살이라도 잡고 싸워야 맞는 일 아닌가? 아니면 내가 정말로 피해망상에 걸린 환자라서 착각하고 있다는 말인가?
무엇이 진실이든 상관없었다. 시댁은, 아니 시모와 시누이는 처음부터 나를 싫어했다. 그것이 이제는 내 아이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미워하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내 아이까지 미워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 이후 나의 시댁에 대한 증오심은 돌에 새겨지게 되었다. 나중에 세월이 흐른 다음에 보면 결국은 다 팔자소관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시댁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을 저지른 것으로만 보였다.
다른 한편으로 서러움이 몰려왔다. 나는 도대체 왜 이리 재수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엄마가 반대하는 결혼을 해서 이 모양이 된 것인가? 누가 뭐라고 하든 내가 꿈꾸던 남자와 결혼하여 여봐란듯이 살겠다는 꿈이 무너져 버렸다. 아이는 내게 고통만 주고 시댁은 내게 인생이 결국 비극으로 끝날 것이라는 몹쓸 암시만 주고 있었다. 결혼만 하면 천국이 기다릴 줄 알았는데 나는 더욱 깊은 수렁에 빠져들 뿐이었다. 결국 내게는 결혼과 출산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내 팔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 길을 다른 데서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 길은 더욱 커다란 고통만을 내게 주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 당시 나는 견디기 힘들었다. 결혼과 육아 그리고 무엇보다 시댁이 내 숨통을 조여왔기 때문이다. 메두사를 보고 내가 돌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남아야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