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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pr 30. 2024

11. 만성 산후 우울증을 내게 선물한 아이

출산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고통의 시작을 알렸다.

첫째 아이의 임신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남편이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깊은 산속에 있는 넓은 계곡이었다. 햇살이 표면에 부서져 내리는 물이 너무 맑아 투명했다. 그런데 그 계곡 건너편에 한 남정네가 앉아 있었다. 그 남정네가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더니 남편을 향해 힘차게 헤엄쳐 왔다. 얼굴이 점차 뚜렷하게 보이는 데 사자처럼 수염이 난 얼굴이 험상궂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호랑이로 변했다. 그러나 남편은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고 했다. 분명히 태몽이었다.    

 

남편에게 부탁하여 임신 테스트기를 두 개 준비했다. 아침에 일어나 안방 화장실에서 테스트했다. 갈색의 한 줄이 먼저 나타났다. 그러더니 서서히 나머지 한 줄도 점점 더 짙은 갈색이 되었다. 바로 다음날 휴가를 내고 남편과 같이 집 근처의 참행복산부인과를 찾았다.      


김혜승 원장은 매우 프로페셔널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초음파 검사를 위해 배에 바른 젤리가 차갑게 느껴졌다. 김 원장이 초음파 검사기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갑자기 검사실 안에 큰 규칙적인 소리가 울렸다.     


‘플럭, 플럭, 플럭...’     


“축하합니다. 임신입니다.”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작고 투명한 땅콩이 가느다란 줄에 매달린 것이 보였다.   

   

“7주 되었습니다.”     


아기 사진 오른쪽 옆으로 심장을 주파수를 나타낸 그래프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 위로 여러 숫자와 영문자가 나란히 보였다. 동영상 아래 맥박수가 보였다.     

 

‘Fetal HR 137 bpm’     


땅콩의 심장이 거기에서 분당 137회의 속도로 고동치고 있었다. 내 안에 다른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니 신기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엄마’가 된다는 것이 실감이 나지 않았다. 뭔가 어색했다. 나는 아직 준비가 안 되었는데 강제로 엄마가 되어야만 한다니 이상했다. 그러나 곁에 있는 남편이 눈물을 글썽이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 이후 책과 인터넷을 통해 태교에 관한 모든 정보를 수집했다. 기왕 임신했으니 훌륭한 아이를 낳고 싶었다. 그리고 그 아이에게는 내가 겪은 신산스러운 삶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세상의 어려움을 능히 이겨나갈 강한 아이를 낳고 싶었다. 남편의 꿈에 나온 그 기골이 장대한 남정네 같은 아이를 낳아야 했다. 그래서 그 아이가 나의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주고 나를 보호해 주어야만 했다. 대충 계산을 해보니 12월 말이 출산 예정일이었다. 아이의 사주를 뽑아보았다. 그런데 12월 마지막 주에는 좋은 사주가 안 보였다. 차라리 그다음 해 1월에 나오는 것이 좋아 보였다. 그러나 너무 늦추면 아이가 커지니 초산이 어려울 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최대한 늦추어 보되 아이가 작게 나오도록 하려면 내가 열심히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지 않았다. 남편은 집에서 쉬면서 태교에 전념하라고 했지만 미덥지 않았다. 일단 내가 직장을 그만두면 수입이 줄어드는 데 아이가 태어나면 돈이 더 들어갈 것이 뻔하지 않은가? 저금을 한 푼이라도 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은 출산하고 나서 그만두더라도 말이다.     

 

병원 사무실은 햇빛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강남 한복판에 있어서 공기도 나쁘고 주변이 너무 어지러웠다. 3층에 있는 병원 창문으로 온갖 음식 냄새와 자동차 매연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어쩐지 그런 소음과 냄새가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문을 꼭 닫고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원장실과 사무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기에 음악을 조금 크게 틀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이 더러운 세상을 차단하고 아이에게 가장 편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는 바로크 음악만 한 것이 없었다. 그래서 가장 좋아하는 바흐와 코렐리 그리고 비발디의 음악을 주로 들었다. 물론 신앙마을을 열심히 다니면서 부르던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사계도 빼놓지 않고 들었다.      


여름이 되면서 배가 본격적으로 부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매주 병원을 찾았지만, 중기에 접어들면서 2주에 한 번 검사를 받았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5개월이 되자 발로 차는 힘도 크게 늘었다. 저녁을 먹고 누웠는데 뱃가죽을 차는 작은 발이 보였다. 남편이 그것을 보고 매우 놀라더니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8월 중순에 출근하는데 비가 엄청나게 내렸다. 버스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다 못해 전철역까지 걸어갔다. 비바람이 너무 거세서 우산을 써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온몸이 비에 젖은 상태로 에어컨이 심하게 나오는 전철을 타니 오한이 났다. 그리고 갑자기 아이가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불편할까 봐 마음이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전철은 만원이라 앉을자리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임신했다는 것이 보일 텐데도 임산부석에 앉은 중년 남자는 빤히 나를 쳐다보면서도 양보를 안 했다. 그렇게 비 맞은 생쥐처럼 전철을 계속 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전철에서 내려 급하게 병원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한여름에도 불구하고 히터를 켜고 몸을 말렸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바흐의 첼로 조곡을 틀었다. 음악을 알아들은 것인가? 아이가 첼로 현의 움직임에 맞추어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그러더니 조용해졌다. 맘이 편해져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몸살 증상이 났다.     


그날 이후 일주일 동안 몸살이 심하게 왔다. 그러나 휴가를 낼 수가 없었다. 직원이 나 한 명인 병원이었기에 대타를 구할 길이 없었다. 그 일주일 동안 내 신경은 온통 아이에게 가 있었다, 몸이 아팠지만 약을 전혀 먹지 않았다. 그냥 앓고 버티기로 했다. 정기 검사가 있는 날 산부인과를 찾아 루틴화 된 검사를 받았다. 다행히 아이는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마음이 안심되니 몸이 아픈 증상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임신 기간을 버티는 데는 음식이 큰 도움이 되었다. 사실 나는 평소에 생선과 돼지고기를 거의 안 먹었다. 그러나 임신하면서 장어구이, 낙지볶음, 해물 칼국수, 그리고 돼지불고기가 당겼다. 그래서 그 메뉴들을 돌아가면서 쉬지 않고 먹었다. 남편은 매운 것은 거의 먹지 못하는 사람이었지만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늘 같이 먹었다. 물론 매운 양념은 반드시 물에 헹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밤에도 갑자기 여러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면 남편이 바로 밖으로 달려 나가서 사 왔다. 원래도 나의 몸종과 다름없는 삶을 살던 남편이었지만 내가 임신하고 나서부터는 더욱 완전한 버틀러의 역할에 충실했다. 학회에 발표해야 하는 논문을 쓰는 도중에도 내가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면 바로 달려 나갔다.     


그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고 마침내 출산일이 다가왔다. 12월 24일 저녁에 진통이 찾아왔다. 간단히 입을 옷과 짐을 정리하고 배가 남산만 해진 아내를 이끌고 남편이 산부인과를 향해 차를 몰고 달렸다. 간단히 검진하고 나서 입원했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침대 위에 누웠다. 남편은 눈을 껌뻑이면서 말없이 내 곁에 앉아 손을 잡았다.      


침대에 누운 지 2~3시간이 흐른 뒤에 갑자기 진통이 왔다.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다. 그리고 깊은 절망감이 나를 엄습했다. 그리고 고통이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했다. 도저히 참기 힘든 매우 기묘한 고통이었다. 그러자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내 곁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원가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들이 나를 괴롭히려고 작당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 음모에 남편까지 가담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남편에게 말했다.    

 

“여보 여기 사람들이 이상해. 나를 괴롭히려고 음모를 꾸미고 있어.”     


남편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기 아기 낳는 것을 도와주는 분들인데.”   

  

“아니야. 여기는 위험해. 집으로 가야 해!”     


“지금 다 저녁에 어떻게 집으로 가?”     


“아냐 가야 해! 당신도 한 편이지?”     


내가 앙칼지게 소리를 지르면서 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러자 남편도 허겁지겁 짐을 싸는 것을 도왔다. 남편은 늘 그랬다.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지옥에라도 같이 갈 사람이었다. 짐을 다 싸자 남편이 나를 부축하게 했다. 남편의 부축을 받으며 침실에서 나와 복도를 걸어갔다. 집으로 가야만 했다. 여기는 너무 위험한 곳이었다. 그러자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우리를 발견한 간호사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남편이 대답했다.     


“아내가 집으로 다시 가자고 해서요.”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움직이면 매우 위험해요. 어서 방으로 다시 들어가세요.”     


그러자 내가 다시 큰 소리로 외쳤다.     


“아냐 여보. 이 사람들이 나를 지금 괴롭히려고 작당하는 거야. 집으로 가야 해!!!”   

  

남편은 어쩔 줄 몰라했다. 남편은 그런 식으로 늘 우유부단한 사람이었다. 그런 우리를 간호사가 다른 간호사를 더 불러서는 강제로 방으로 다시 끌고 갔다. 나도 배가 너무 아파서 더 이상 저항할 힘이 없었다. 한겨울이었지만 진땀으로 온몸이 푹 젖었다. 어쩔 수 없이 탈출을 포기하고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다시 눕자마자 간호사에게 말했다.     


“지금 너무 아파서 그러는 데 무통 주사를 놓아주시면 안 되나요?”     


“잠시 기다리세요. 원장님 모시고 오겠습니다.”     


김 원장이 왔다.    

 

“어디 좀 봅시다. 조금 열렸네요. 문제가 될 것이 없어요.”     


내가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선생님. 제왕절개수술을 하면 안 될까요? 너무 아파요.”    

 

“아뇨 지금 상태로는 자연분만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김 원장이 무심하게 방을 나갔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가 막혔다. 그래서 눈물이 났다. 그런 내 모습을 본 남편은 티슈로 내 눈물과 땀을 닦아 주었다. 너무 무기력한 남편이었다. 내가 얼마나 큰 고통에 있는지도 모르고 나를 괴롭히려는 의사와 간호사의 말을 믿는 아주 나이브한 남자였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손에 나의 운명을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다시 진통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번 진통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리 지극정성으로 9달이나 태교를 했는데 아이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토록 괴롭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아이에 대한 미움이 몰려왔다. 무슨 마음으로 나를 이토록 괴롭힌다는 말인가? 내가 그리 잘해주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인제 와서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저 이 음모에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또 서너 시간이 지났다. 갑자기 김 원장이 들어왔다. 검사를 하더니 간호사들에게 산실로 나를 옮기라고 명령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산실은 춥고 어두웠다. 산실로 따라온 남편은 미리 준비한 비디오카메라를 돌리기 시작했다. 침대 위에 누워 다리를 벌리고 김 원장은 아이를 받아낼 준비를 하였다.    

  

“자 열렸어요. 힘을 주세요. 하나 둘 셋!”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아프다는 단어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생전 처음 느끼는 고통이 온몸을 감쌌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이 고통이 계속 밀려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차라리 죽고 싶었다. 천장의 조명이 마구 흔들렸다.      


“자 힘을 주세요., 다 나왔어요. 하나 둘 셋!”    

 

배가 너무 아팠다. 그리고 회음부가 파열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뭔가 내 몸에서 강력하게 빠져나갔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아이의 힘찬 울음소리가 산실 안에 울려 퍼졌다.      


“축하합니다. 공주님입니다.”     


공주라고? 분명히 아들인 줄 알았는데. 김 원장이 탯줄을 끊기 전에 아이를 내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너무 낯설었다. 어쩐지 9개월 동안 내 몸 안에서 애지중지 태교하던 그 아이가 아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마치 태어나면서 내 배 속에 있던 아이가 전혀 다른 아이와 바뀐 느낌이었다. 몸에 피가 약간 묻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어떤 낯선 아이가 내 가슴 위에서 계속 울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가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서 아이를 빨리 내 가슴에서 내려놓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내 입에서는 내 맘에도 없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아가야. 이쁜 아가야. 힘들었지? 그래. 그래.”    

 

마침내 아이가 내 가슴에서 들려졌다. 어둠 속에서 남편이 다가왔다. 간호사가 남편에게 탯줄을 자르라고 했다. 남편은 아기를 찍던 캠코더를 내려놓고 탯줄을 잘랐다. 간호사는 아기의 발과 손에 잉크를 바르고 종이에 지문 찍듯이 손과 발을 지그시 눌렀다. 그 아이가 이 세상에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나서 간호사가 남편에게 아이를 안아보라고 했다. 남편은 아이를 안더니 또 눈물을 흘린다. 남자와 왜 저리 눈물이 많을까? 속이 상했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당당하게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통제해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나의 바람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그래서 더 이상 남편에서 말할 기운이 없었다. 김 원장의 뒤 처리가 끝난 다음 간호사가 아이를 아기방으로 데려갔다. 나는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첫 아이의 출산이 끝났다. 그러나 첫 아이로 시작된 나의 고통스러운 삶은 이제 막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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