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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May 14. 2024

14. 가출이 아닌 출가를 원하는 여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야만 했다.

아이가 내 젖을 물고 놓지 않는다. 도대체 이 아이가 이렇게 내 골수를 다 빨아먹기 위해 존재하다니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로 살자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왜 이러는가? 그리고 남편은 직장을 핑계로 하루 종일 나가 있으면서 이 고통을 전적으로 내가 혼자 감내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 답답해서 내 이야기를 블로그에 올리니 꼬리 글에 욕이 포도송이처럼 달린다. 전업주부 주제에 무슨 불만이 그리 많냐는 것이다. 그러나 전업주부는 사람이 아니란 말인가? 나도 내 인생이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이것은 정말 아니었다. 나의 인내심이 바닥 났다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현관문 소리가 나자 바로 달려 나가 아이를 남편에게 맡기고 안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오늘 처음 누워본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세수하고 나서 주방으로 온다. 오늘은 화가 나서 저녁도 준비 안 했다. 남편은 익숙한 듯이 라면 물을 올려놓는다. 달걀을 두 개 풀어 급히 먹고 나서는 설거지를 한다. 우리는 신혼 초부터 가사 분담을 분명히 했다. 설거지와 쓰레기는 남편이 청소와 빨래는 내가 하기로 말이다. 설거지는 너무 더럽고 힘들었다. 그래서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기꺼이 설거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유학 시절 요리와 설거지를 ‘즐겁게’ 한 경험 때문이란다. 뭐 좋다니 너무 다행이었다. 설거지를 끝내기를 기다렸다. 예의 서재로 가는 남편을 불러 세웠다.     


“여보 나하고 이야기 좀 해.”     


“그래.”     


우리는 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여보 나 엄마 역할에서 사표를 쓰고 싶어. 너무 힘들어.”     


“무슨 말이야?”     


“하루 종일 아이와 둘만 있으니 미칠 것 같아. 오늘 낮에는 아이가 하도 치대서 아이에게 마구 소리를 질렀어. 소리를 지르다 보니 내 목소리가 기괴하게 들리더라고. 나도 모르게 괴성을 지르고 있었어. 이러다가 아무래도 내가 미쳐버릴 거 같아.”     


남편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남편 품에 안긴 아이는 남편을 바라보면서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다. 사실 사주로 본다면 이 아이는 내 아이가 아니라 남편의 아이였다. 남편 사주에는 연주에 강한 관성이 자리를 잡고 시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내 사주는 지장관을 파보아도 식상이 없다. 원래 무자식 팔자인 내가 아이를 낳은 것은 전적으로 남편 때문이었다. 그래서인가? 남편은 아이를 너무 버릇없이 키운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단 한 번도 거부한 적이 없다. 아이 얼굴이 친탁해서 시모의 모습이 보였다. 내 눈에는 그랬다. 그런데 남편은 시모의 모습이 전혀 없고 나를 닮아 너무 예쁘다고 했다. 내 눈에는 좀 귀여운 편이지만 결코 나만큼 예쁜 얼굴은 아니었다. 나는 어릴 때 동네에서 소문난 미녀였다. 동네에서 공주가 났다고 소문이 자자할 정도였다. 그런데 아이는 시모를 닮아 그 정도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남편은 아이를 안고는 늘 물고 빨고 하면서 정신을 못 차린다. 남편의 눈이 별로 높지 않아서 그럴 수밖에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남편 사주에 관성이 용신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이해하지만, 그런 남편 모습을 보면 정말로 이상했다. 그렇게 밤에도 잠을 안 자고 부모에게 치대면서 먹을 것만 찾고 집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애가 왜 그리 이쁘다고 하는지 정말로 이해가 안 되었다.     


“아무래도 애가 나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는 거 같아. 그러니 애를 자기가 키워. 나는 이제 내 길을 찾아볼래.”


남편이 별 반응이 없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한두 번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아내가 힘들어 또 잔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남편의 태도를 보니 더 부아가 났다. 나는 정말로 힘들고 매우 화가 나 있는데 남편은 늘 이런 식이다. 이번에는 적당히 넘어갈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일단 우리 따로 살아봐. 내가 집을 나가서 어디 가서 한 달이라도 있다 올래. 그러지 않으면 나 미쳐버릴 거 같아.”     


남편이 비로소 반응을 보인다.     


“힘들면 어린이집에 맡기는 거는 어때? 내가 퇴근하고 데려오면 되잖아. 우리 애가 어린이집에 가도 되는 나이 아냐?”     


“아니 애만 문제가 아냐. 집에 하루 종일 이렇게 애만 붙들고 살면서 빨래하고 청소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이거는 사람이 사는 게 아니야. 나는 이렇게 살려고 결혼한 거 아냐.”     


“그러면 청소도 내가 할게. 그리고 음식은 내가 퇴근하면서 사 올게. 요리하지 마. 그리고 집에 있는 것이 답답하면 주중에 휴가를 내서 어디 바람 쐬러 가면 되잖아. 애가 아직 어리니 엄마가 필요할 거 같은데. 우유야 내가 타서 주면 되지만, 엄마를 찾고 아직 젖도 먹고 그래야 하잖아.”     


“나는 애 젖이나 주고 빨래나 하는 여자가 아니라고. 나도 내 인생을 찾고 싶어.”     


“당신이 원하는 거 있으면 해. 뭘 하고 싶은데.”     


내가 뭘 원하냐고? 사실 나도 잘 몰랐다. 내가 뭐 하고 싶은지. 그러나 일단 이렇게 집에서 아이나 키우고 하루 종일 무기력하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뭐든 아이 키우는 것 말고 다른 보람이 있는 일을 찾아야 했다. 이렇게 집에서 무기력해지고 무능해지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아이를 키우느라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를 지경이 되었다.     


내가 대답을 안 하자 남편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일 휴가를 낼 테니 바람이나 쏘이러 가자. 아니 마침 목요일이니 금요일까지 휴가를 내서 주말까지 2박 3일로 자기 좋아하는 부산에 가자. 내가 당장 호텔 예약할게.”     


부산 근처 기장에는 내가 전에 다니던 신앙 마을의 큰 공동체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살아있는 하나님께서 그 땅이 말세에 구원받을 수 있는 터라고 가르친 곳이었다.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다니던 곳이라 나에게는 마음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그곳에 갈 때마다 종교적 기적을 체험했다. 하늘에서 성령의 이슬이 내리곤 했던 것이다. 그 이슬의 향기는 세상 어디에서도 맡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모임에 모인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거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때는 엄마는 그 기적을 체험하지 못하고 나만 온몸으로 충만하게 느끼곤 하였다. 그때 나는 내가 특별히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확신했었다.      


결국 남편의 설득에 굴복하여 부산에 가기로 했다. 숙소는 부산에 갈 때마다 머물렀던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이었다.      


남편은 늘 이런 식으로 나의 진심을 모르고 임기응변식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데 급급했다. 우유부단하고 너무나 유약한 남편이었다. 분명히 내 꿈에 나온 그 사람이 맞지만, 막상 결혼해 보니 내가 바라던 남자가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남자는 강하고 능력이 뛰어나서 내가 아무런 걱정 없이 의존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그와는 정 반대에 있는 사람이었다. 폭력을 증오했다. 그 누구에게도 큰 소리를 내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기가 모든 어려운 일을 혼자 감당해 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능력이 안 되는 데 그렇게 살아가니 힘들 것은 당연했다. 남편의 변명은 있었다. 예수의 삶을 닮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예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신의 아들로 전능한 권력을 지녔지만, 불쌍한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준 존재였다. 그에 비해 남편은 무기력하고 무능하였다. 그저 남에게 아쉬운 소리 못하고 남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다 해주고 고통을 즐기는 마조키스트였다. 이것은 분명히 정신병리적인 증상이었다. 당연히 시댁은 물론 주변 사람들이 남편을 착하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그 칭찬은 자기들에 이익이 되니 하는 것 아닌가? 남편은 그런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이용당하지 말고 영리하게 살라고 충고하면 남편의 대답은 늘 같았다.      


“예수님은 내게 분명히 말씀하셨어. 이웃을 위해 내 목숨을 바치기까지 해야 한다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럴 거면 뭐 하러 결혼했나. 그냥 예수 붙들고 살지. 남편이자 아버지가 된 사람은 그리 살면 안 되는 것 아닌가? 참으로 답답한 사람이었다. 아이 때문에 미칠 것 같은데 남편도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그래도 일단 부산에 가서 바닷가에서 좀 쉬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집이 너무 답답했다. 50평이라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내 마음을 졸여 오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부산에 가서 신앙 마을도 들러보면서 남편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찾은 것이다. 나는 가출이 아니라 출가를 원하고 있었다.  내 영혼에 자유의 날개를 달고 훨훨 날고 싶었다. 기장 땅에서 그에 필요한 기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내가 중학교 때 체험한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이다.  부산을 향해 남편이 운전하는 차 안에서 나는 그런 꿈을 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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