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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rancis Lee Aug 27. 2024

국군의 날이 조선총독부 설립일이라고?

팩트가 아니라 증오가 문제다.

윤석열 정부가 느닷없이 10월 1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겠다고 나섰다. 이유는 군 사기 진작, 소비 진작, 기업 부담 경감이다. 10월 1일이면 이미 9월에 추석 3일 연휴를 포함하여 최대 1주일 정도를 쉰 다음에 하루 더 쉰다고 무슨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하루 쉰다고 군의 사기가 진작된다고? 이거 무슨 당나라 군대 이야기도 아니고. 군대 못가본 자가 득시글 거리는 정권에서 나온 발상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그러던 차에 야당에서 1910년 10월 1일이 조선총독부가 설립된 날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들고 나오면서 윤석열 정권의 ‘정체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단서를 또 찾아냈다. 윤석열 정권을 증오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솔깃한 말일 수밖에 없다. 하루가 멀게 친일 논란으로 조용할 날이 없는 상황에서이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보 보수 진영 논리를 떠나서 이런 논쟁은 사실 의미가 없다. 윤석열 정권이 친일 행보를 보이는 근본적 이유는 단 한 가지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한국을 동북아에서 러시아의 세력 확장을 막고 중국을 견제하는 전초기지로 만들려는 패권주의 전략에 순응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일군사동맹이 필수적이니 친일 행보는 불가피하다. 그리고 미국의 환심을 사야 윤석열이 5년짜리 권력을 놓고 나서도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것이 아닌가?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 수 있는 이런 사실을 국민이 모를까? 대다수는 알고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데도 사사건건 윤석열 정권과 야권, 그리고 더 크게는 진보와 보수 진영이 개별 사안을 놓고 이렇게 대립하는 이유는 오로지 하나다.


증오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이 사안을 바로 보는 시각을 왜곡시킨 것이다. 인구가 ‘겨우’ 5천만 명 남짓되는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4강의 이해 다툼이 첨예하게 지속되는 한반도에서 남북이 갈라진 것도 모자라 이렇게 이념으로 갈라지고, 전라도 경상도 지역으로 갈라지고 인서울과 나머지로 갈라지고, 서울도 강남과 나머지로 갈라져서 과연 누가 이득을 볼까?     


상대방이 꼴 보기 싫어서 ‘빨갱이 딱지’를 붙이고, 상대방이 꼴 보기 싫어서 ‘친일 매국노 딱지’를 붙이는 현재 상황에서 이것도 저것도 다 싫은 사람은 어디에 기대어 살아야 하나? 이도 저도 아니라고 하면 ‘회색분자’라고 또 다른 딱지를 붙이는 나라에서 살아날 방도는 거의 없어 보일 정도다. 그래서 이제 뭔가 나라를 위해 일할 의욕이 사라지고 될 대로 되라는 자포자기의 마음을 먹은 젊은이가 이리 많이 늘어나는 것일까? 분열과 증오가 넘치는 사회가 도달할 곳은 다 같이 죽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왜 이리 한국은 같은 한국인끼리 벌이는 증오와 분노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5천 년 역사에서 겪은 사달에서 하나의 진리를 몸으로 배운 것이다. 그것은 곧 ‘믿을 놈’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단일 민족이라는 것도 허구라는 것이다. 굳이 DNA 검사를 할 필요도 없다. 전라도와 경상도가 맞붙어 있지만 언어와 정서가 너무 다르다. 그래서 사실 ‘남’이다. 농반진반으로 경상공화국과 전라공화국이 들어서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서로 다르다. 강남 사람들은 나머지 지역에 사는 사람이 같은 시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치동 학원가가 등하교 시간에 교통이 마비되고, 강남 주민들의 공용어는 한국말이 아닌 영어이고, 강남의 집값은 나머지 지역과 감히 비교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강남인’의 이런 생각이 이해 못 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한국 안에서 지지고 볶고 살 때는 이런 차이와 분열이 확실해 보이고 서로 다른 인종이 섞여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외국에 나가보면 한국인 사이의 차이는 거의 무의미하다. 한국에서 아무리 피부가 희고 얼굴이 작고 다리가 긴 것을 자랑해도, 일단 비행기 타고 나가면 그냥 황인종이다. 강남에서 영어를 ‘프리 토킹’ 해도 미국에 가면 코리언이다. 한국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해서 세계의 20위 권 안에 든다고 해도 전 세계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한국에서 180cm가 안 되면 루저가 되지만 서양에 나가면 180cm가 넘어도 ‘동양인’이다. 한 마디로 대한민국 국민은 다 같다. 심지어 한국에서 장관, 국회의원, 의사, 변호사를 하고 강남의 수백억 원짜리 아파트에 살아도 외국에 나가면 ‘한국인’도 아니고 ‘동양인’이다. 결국 그 나물에 그 밥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동양인인 한국인들은 스스로 갈라서지 못해 이리 안달이 난 것일까? ‘빨갱이’와 ‘친일 매국노’이기 때문에 증오하는 것이 아니다. 증오하기 때문에 ‘빨갱이’와 ‘친일 매국노’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위에서 말한 대로 증오의 근본 원인이 한반도에서 빈번하게 벌어진 환란을 통해 ‘믿을 놈’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절절하게 체험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그저 그런 동네 사람으로 더불어 살았는데, 난리가 나자 ‘본색’이 드러나서 이른바 ‘바닥 빨갱이’가 평소 감정이 있던 이웃을 ‘매판 자본가’ 딱지를 붙여 죽창으로 찔러 죽이고, 북한군이 패퇴하자 개인적 감정이 있던 사람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여 총으로 쏴 죽인 나라가 바로 이 대한민국이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친일 세력이 잘 먹고 잘 사는 꼴을 보고 분노한 이들이 ‘친일 청산’을 내세운 것도 따지고 보면 분노 때문이다. 분명히 벌을 받아야 할 놈들이 잘 살 뿐 아니라 뻔뻔하게 변명하며 잘난척하는 꼴이 역겨운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리고 그런 ‘친일 매국노’ 출신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는 자들이 보기에 자기를 공격하는 국민은 질투에 눈이 멀어서 개인적인 감정을 배설하는 것으로 밖에 안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5천만 명에 불과한 국민이 모래알처럼 갈라지고 서로를 증오하는 상황에서 전쟁이 또 나면 어찌 될까? 1950년 한국전쟁 때 돌았던 남북한 군인이 죽인 것보다 일반인들이 서로 죽인 숫자가 더 많다는 소문이 단순히 소문만이 아닐 것 같다는 공포감이 몰려오지 않나?     


도대체 우리 한국인은 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다 못해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난 상황에 빠지게 되었나? 단순히 믿을 놈 하나도 없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믿을 놈 없으면 조심하면 그만 아닌가? 그렇다면 속담대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서 그런가? 배가 아프면 좀 참고 정 안 되면 약을 먹으면 될 것 아닌가?      


더 큰 문제는 그냥 아무 확실한 이유 없이 상대방을 증오하는 것이 스스로 생각해도 쪽팔리니까 딱지 붙이기에 몰두한다는 사실이다. 네가 ‘빨갱이’라고 주장하면 자신의 증오가 정당화된다고 여긴다. 네가 ‘친일 매국노’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 식으로 빨갱이와 친일 매국노 밖에 없는 나라가 되면 어떤가? 결국 다 같이 죽는 수밖에 더 있나 말이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권은 물론 국회에서도 이런 증오를 줄이기는커녕 부채질하는 언동만 일삼는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지지 세력의 구미에 당기는 언행을 해야 정치 생명을 연장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행태가 소탐대실에 이를 것이 명확한데도 그 모양이다. 이승만이 박정희를 낳았고 박정희가 전두환을 낳았다. 그런데도 진영 논리에 묻혀 이승만 우상화 박정희 숭배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홍범도, 김구 ‘죽이기’까지 서슴지 않는다. 그런 이유는 너무나 뻔하다. 그래야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30% 콘크리트가 기뻐 날뛰기 때문이다. 그런 세력을 보고 참지 못한 또 다른 진영은 이들을 싸잡아 ‘친일 매국노’라는 낙인을 찍는다. 그래야 자기 진영이 열광하고 지지하게 때문이다.     


이렇게 집안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치와 경제 상황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정말로 이러다가 전쟁이 또 나면 외부의 세력이 힘쓸 필요도 없이 대한민국이 자멸할 것만 같다.      


국군의 날을 임시 휴일로 정하는 것은 필요하면 해도 된다. 다만 그런 결정을 하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국민의 뜻’을 묻고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가 필요하다. 그런 정상적인 방법이 있는 데도 느닷없이 ‘용산의 뜻’이라는 명분으로 밀어붙이기에 이런 사달이 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달이 나면 정치꾼들은 손해 볼 것이 없다. ‘자기편’의 지지를 더 끌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편 가르기 하는 동안 친일 세력이 아닌 일본이 한국을 잡아먹고, 빨갱이 아닌 러시아가 한국을 ‘잡아먹는’ 사달이 벌어지지 않을까? 분열된 민족은 쉽게 넘어지는 법이다. 조선이 비록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지금처럼 딱지 붙이기에 혈안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 차원에서 현재 한국이 처한 상황은 조선 말기보다 더 나빠 보인다.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증오를 이기는 것은 오로지 사랑뿐이다. 굳이 예수의 어록을 들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사랑할 건덕지가 없고 밉기만 한데 어딜 보고 사랑할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Max Scheler가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사랑은 사랑받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내적인 창조적 변화다.’     


그렇다. 사랑받을 만한 사람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적으로 변하여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모든 사람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된다. 문제는 남이 아니라 내게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마음이 들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측은지심이다. 맹자가 말한 대로 나와 무관한 아기가 우물에 빠질 지경에 있다면 설사 그 아이가 원수의 아기라도 일단 구하고 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예수가 배고프고 병든 이를 보고 느낀 ‘애간장이 끊어지는 마음’, 곧 스플랑그니초마이가 바로 그런 인간의 본성이다. 사랑은 인간의 본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는 그런 본성이 가려지고 오로지 증오와 질투에서 나오는 분열과 갈등만이 범람하고 있다. 결국 인간의 선한 본성을 되찾는 교육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데, 과연 누가 나서서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이미 때가 늦은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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