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원하는 때와 장소에서 만나게 된다.
독일에서의 공부와 유럽 여행을 오랫동안 꿈꾸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자 일반적인 '꿈과 현실의 괴리'로 흔들릴 수밖에 없았다. 이전 글에서 말한 대로 매우 기적적인 출발을 했음에도 그랬다. 무엇보다 전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데에는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다행스럽게도 음식은 입맛에 잘 맞았다. 맵고 짠맛이 강한 한식에 비해 독일 음식은 짠맛은 더 강했으나 그 맛과 질감이 매우 부드러워 위에 자극이 없었다. 어려서부터 위가 약했던 필자에게는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독일 생활을 하면서 한국 음식을 그리워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음식 이외의 모든 것은 힘들었다. 여전히 어려운 언어, 느린 학사 행정과 공공 행정에 적응하는 일은 무한에 가까운 인내와 노력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어려운 순간마다 문자 그대로 '귀인'의 도움이 있어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타향살이'는 근본적으로 실존적 한계 상황 한가운데에서 '생존 훈련'을 강요받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24시간, 심지어 잠자는 시간에도 몸과 마음은 늘 긴장 상태에 놓여 있었다. 속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도 없는 상황이라 한국에 남은 가족들과 짧은 전화 통화하는 것이 유일한 위로가 되었다. 물론 동료 유학생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도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렇게 주말에 한국인을 만나 한국말을 하고 나면 월요일부터 시작되는 학교 생활에서 독일어를 사용하는 데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일이 벌어졌다. 독일식으로 생각해야 독일어가 잘 되는 법이니 그랬다. 가장 힘든 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은 혼자 해결해야 되는 상황이었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서 가족, 친구, 이웃의 눈에 보이지 않는 도움이 얼마나 많았는지도 깨닫게 되었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고 한 학기가 지나자 정신적 위기가 왔다. 불안 증상이 심해지고 잠을 잘 자지 못했다. 그럴 때 찾게 되는 것이 역시 신이었다.
그래서 독일 성당에 열심히 나가기 시작했다. 주일 미사만이 아니라 주중에도 틈만 나면 성당에 가서 관상 기도를 했다. 관상 기도는 마음을 완전히 비우고 하는 묵상 기도와 달리 눈앞에 예수나 마리와 같은 구체적인 대상을 떠올리면서 하는 기도다. 당연히 필자는 예수를 바라보는 기도를 했다. 그러나 막연히 하는 기도로는 5분도 안 되어 집중력이 흩어졌다. 그래서 9일기도를 시작했다. 라틴어로 novena라고 하는 9일기도는 9일 단위로 드리는 가톨릭 전통 기도 방식이다. 특정한 형식이 있지만 필자는 묵주기도를 택해서 시작했다. 저녁에 기도하는 시간이 되면 작은 십자고상을 앞에 두고 초를 켰다. 성모송은 라틴어로 주기도문은 독일어로 나머지 기도와 간청은 한국어로 했다. 어떤 말을 신이 더 잘 들을지 알 수 없었기에 그랬다. 그렇게 9일 단위로 세 차례 기도를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성모송을 라틴어로 암송하고 있는데 갑자기 심장 근처에서 형언할 수 없는 따스함이 솟구쳤다. 그리고 그 온기는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촛불의 열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겨울의 냉기가 창문을 통해 스며드는 반지하 방에서 작은 촛불이 그 정도의 열기를 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따스함은 물리적인 열이 아니었다. 은은한 따스함이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큰 위로가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기쁘기보다는 눈물이 났다. 온몸이 그 따스함에 감싸진 느낌 속에서 흐느껴 울었다. 그렇게 한 5분 정도 시간이 흘렀다. 그 느낌이 서서히 몸을 빠져나갔다. 정신 차려 보니 필자는 다시 냉기가 감도는 반지하 자취방에 혼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성령체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히 개인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니 다른 사람과 온전히 나눌 수 없는 매우 특별한 경험이었다. 이후에도 필자는 몇 차례 더 성령체험을 했다. 그 체험은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체험으로 성경에 나온 대로 성령은 당신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성령체험을 해도 현실 생활에서 특별히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여전히 경제적 어려움, 언어에서 오는 장벽, 학교와 관청의 행정 업무에 따르는 어려움이 있었다. 흔히 말하는 대로 공부가 제일 쉬웠다. 그럼에도 이날 이후 필자는 성령이 함께 한다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시작했다는 말은 아직 100% 확신이 안 섰다는 말이다. 그래서인가? 이후에도 여러 차례 성령 체험을 하게 된 것이다. 마치 물 위를 걷는 기적을 체험하고도 의심하는 베드로 같아서 신은 필자에게 계속 이 체험을 하도록 이끄신 것이었다. 신은 인간이 당신을 온전히 믿어줄 때까지 계속 신호를 보내는 법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첫 번째 성령 체험보다 더 강력한 두 번째 체험은 박사 학위 공부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왔다. 특히 경제적 문제가 매우 심각한 상황이 겹치면서 정신적 위기는 더욱 심각한 상태에 이르렀다. 독일에서 신학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기에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 시험을 먼저 통과해야 했다. 특히 라틴어는 필기시험 위주의 kleines Laatinum은 물론 구두시험까지 포함된 grosses Latinum까지 통과해야 했다. 라틴어 한 과목만 꼬박 2년이 걸렸다. 외국어인 독일어로 '죽은' 언어인 라틴어는 물론 성경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우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그렇게 언어와 기본 강의와 세미나를 듣는데만 5년이 걸렸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정체가 시작되었다. 논문 주제도 바뀌었다. Max Scheler의 철학적 인간학에서 유교 문화권에서 기독교 정신의 수용이라는 거대 담론으로 바꾼 것이다. 주제를 바꾼 결정적 이유는 물론 예수였다. 개인적인 성령 체험과 신학부의 강의를 통해 더 '깊이' 알게 된 예수의 정신에 매료된 것이었다. 예수가 말하는 사랑의 본질적 의미, 그의 언행일치의 근본적 힘, 기독교 교회가 보여주는 모순, 20세기 이후 힘을 잃어가는 교회의 잘못과 같은 다양한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 연구를 하면서 유교 문화권에서 나고 자란 한국인인 필자가 서양의 제도화된 종교의 교주인 예수를 받아들이는 개인적 체험을 구체적으로 학문적으로 설명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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