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우 근본주의 기독교 세력의 무지만이 아니라 적그리스도의 면모를 보여준다
최근 한국의 극우 찌라시인 조중동과 그 아류들이 미국의 극우 청년 지도자 찰리 커크가 ‘순교자’로 추앙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식의 기사를 올렸다. 한국의 찌라시에서 밥 빌어먹는 기레기들 수준은 이미 알려진 바라 그러려니 하는데 툭하면 외신보도를 인용하기에 찾아보았다. 그러나 미국 독일 프랑스 영국의 주류 언론을 검색해 보아도 찰리 커크가 '순교자'라고 주장하는 기사를 찾지 못했다. 온라인의 극우 매체 정도에서만 언급하는 정도다. 워낙 찰리 커크가 극우 기독교적 세계관과 공화당 정치 노선을 결합해 미국 청년층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기독교적 개념인 '순교'를 접붙이고자 애쓰는 모양새이나 어림반푼어치도 없는 수작이다. 무엇보다 순교라는 기독교의 개념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순교란 단순히 억울하게 공격받는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 순교자는 신앙이나 보편적 진리를 위해 자신의 결단으로 죽음에 이른 이들을 지칭하는 매우 종교적인 용어다. 본래 이 단어는 초대교회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리스어로 μάρτυς , 곧 '증인'을 의미했다. 그래서 순교자는 단순한 정치적 피해자가 아니라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 생명을 자발적으로 내놓은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런 본래의 뜻을 넘어서 역사적으로 ‘순교자’라는 단어는 단순히 기독교의 신앙적 의미 이상을 지닌 단어가 되어 고통과 희생의 상징이 되었다. 로마 제국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증언하다가 죽임을 당했을 때, 기독교인은 그들을 신의 외아들 예수에 대한 확고한 더 나아가 죽음을 불사하는 믿음을 증언하는 숭고한 ‘희생자’로 여겼다. 특히 2~3세기에 걸친 박해 속에서 이러한 순교는 기독교 공동체의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그래서 순교자가 처형당한 장소나 무덤은 신자들이 순례하는 성지가 되었다. 그리고 순교자들의 이야기는 기독교 신자들의 신앙을 지탱하는 모범적인 사례를 설명하는 중요한 도구가 되었다. 그리고 예를 들어 <마르쿠스 순교록>이나 <폴리캅 순교사>와 같은 문헌은 아예 신앙 때문에 고난을 겪는 이들을 높이 찬양하면서 순교를 단순한 죽음이 아닌 ‘승리’로 재해석했다. 이런 전통에서 모든 순교자는 성인의 반열에 올라 전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폴리캅 순교사>에 나오는 스미르나의 감독 폴리캅은 로마 제국에서 행해지던 황제 숭배의 명령을 거부하며 순교당하기 전에 “나는 86년간 주를 섬겼는데 그분이 나를 버리신 적이 없었다. 어찌 내가 내 구주를 모독할 수 있겠는가?”라고 증언했다. 이 말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순교자가 왜 누구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지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폴리캅은 개인적 정치 이데올로기나 권력 다툼, 더 나아가 편 가르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앙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순교는 정치적 견해차이 때문에 타인의 손에 살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원해서 죽음을 택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극우 세력은 이런 순교의 역사적 기독교적 의미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채로 그저 자기의 담론을 강화하기 위해 순교 개념과 연관된 피해자 서사를 적극 활용한다. 찰리 커크는 ‘Turning Point USA’라는 단체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보수주의를 전파했다. 그는 자유시장경제, 전통적 가족 가치, 기독교적 윤리 등을 옹호하면서 특히 좌파와 진보 세력을 적대시했다. 특히 소셜미디어에서 사회 질서 파괴적인 과격한 언사를 남발하여 계정 정지를 당하거나, 언론에서 강한 비판을 받으면 그의 지지자들은 이를 곧바로 ‘박해’와 연결시키고 그를 이른바 ‘문화적 순교자’로 부르면서 집단적 결속을 강화했었다.
그러나 이것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전통적 의미의 순교와는 다른 말장난에 불과한 것이다. 커크는 극우주의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비판을 받았고 같은 공화당 계열의 청년에게 개인적인 견해차로 총에 맞아 죽은 것이지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 아니다. 그가 겪은 죽음은 단순히 사회적 정치적 갈등의 결과이지 숭고한 믿음을 위한 자발적인 희생이 아닌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에게 ‘순교자’ 칭호를 붙이는 것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지나친 과장일 뿐이다. 사실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희생자 추모는 과거 나치 독일이나 소비에트연방과 같은 파시스트나 빨갱이 나라에서 흔히 하던 짓이다. 정치적 담론에서 순교 개념을 오용하면 순교의 본질적 의미가 희석되는 것은 당연하다. 커크의 말과 글이 검열당한 일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우파 청년에게 살해당한 것을 순교로 부른다면 과거 기독교 신앙을 위해 스스로의 뜻에 따라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찐 순교자'를 모독하는 일일 뿐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는 일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극우 세력의 집단적 피해자 의식을 과잉 강화하여 사회적 갈등을 조장하고 민주주의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이성적인 대화를 가로막는 파렴치한 짓이 된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시작된 기독교 근본주의는 성경의 무오성과 전통적 신앙을 수호하기 위해 등장했다. 이런 기독교 이단이 등장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동안 정통이라고 주장해 온 기독교의 많은 이론이 근대의 합리주의와 과학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기독교가 더 이상 사회적인 중심의 자리에 서지 못하고 주변부로 밀려나는 치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독교의 권위가 무너지자 살아남기 위해 과격한 근본주의에 매달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과거의 기독교의 영광을 재현할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 근본주의는 단순한 신학 운동이 아니라 정치적 운동으로 변모했다. 특히 1970년대 이후 등장한 Moral Majority, 곧 '도덕적 다수'’와 같은 단체는 복음주의 신앙을 낙태 반대, 동성애 반대, 학교 기도 부활 등과 같은 정치적 의제와 결합시켰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은 역설적으로 자신이 세속 사회에 의해 박해받는 소수라는 담론을 반복한 것이다. 이러는 가운데 미국의 극우 복음주의자들은 자신의 정치적 실패나 법적 패배를 ‘순교적 경험’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기들이 시대에 뒤떨어진 더 나아가 예수의 근본적인 가르침과도 어긋나는 어리석은 주장을 하면서도, 예를 들어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 이후 동성혼 반대 운동을 전개하면서 이 시대가 신앙의 순교를 강요받는 시대라고 떠들어 댄 것이다. 찰리 커크도 이런 담론의 연장선에 있던 인물이다. 그는 살해당하기 전부터 이미 기독교 근본주의의 가치가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상황을 ‘순교’의 한 형태라고 포장한 것이다.
사실 이런 과격한 기독교 근본주의적 주장은 찰리 커크가 처음 한 것은 아니다. 이슬람 이민자와 다문화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극우 정치인 에릭 자무르는 언론과 법정에서 여러 차례 외국인, 정확히는 비기독교인 혐오발언으로 기소되거나 비난받았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는 극우 세력은 자무르가 표현의 자유를 지키다가 박해를 받는 문화적 순교자라고 주장하였다. 1948년 국제연합이 발표한 <세계인권선언>의 내용을 이들은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그저 기독교만이 종교이고 기독교인만이 사람인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교리로 보아도 자무르는 결코 순교자가 아니다. 그가 당하는 일은 기독교 종교의 신앙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혐오 발언 때문이었을 뿐이다. 자무르에 버금가는 인물로 헝가리의 오르반도 있다 그는 보수를 가장한 근본주의 기독교 가치를 내세우며 서유럽의 자유주의가 헝가리의 전통적 가치와 신앙을 ‘탄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헝가리 국민 전체가 일종의 ‘순교 공동체’라는 어처구니없는 주장까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순전히 자기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가난한 나라인 헝가리의 국가주의적 피해자 담론을 교묘하게 기독교 순교자 담론으로 포장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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