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자기 신격화

교황 무오류성과 성직자 계급제도가 예수를 욕먹인다

by Francis Lee

기독교 교회의 역사에서 가장 심각한 교만은, 신적 권위를 인간 제도와 동일시한 데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 불리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리스도의 대리자”를 자처하며 신의 자리를 대리하는 권력 기관으로 변모했다. 이 자기 신격화의 근원에는 교황권의 신성화, 그리고 성직자 계급제도의 제도화가 자리하고 있다. 예수가 세운 공동체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나누는 형제 공동체’였으나, 중세의 교회는 ‘천상 권위를 독점하는 피라미드식 구조’로 변질되었다. 이러한 변질은 단순한 정치적 우연이 아니라, 교만이라는 영적 악덕이 제도화된 결과였다. 교회는 신을 경배하기보다, 다름아닌 자신을 경배하게 만들었으며, 신의 이름으로 권력을 정당화했다.


교황제도의 근거는 다음과 같은 마태복음 16장 18절의 구절에 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 한 문장은 2천 년 교회 권력사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초기 교회는 이 구절을 오늘날처럼 ‘베드로 개인에게 부여된 절대권’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오리게네스, 아우구스티누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같은 교부들은 “반석”을 그리스도 자신 또는 신앙 고백으로 이해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집에서 “반석은 베드로가 아니라 그가 고백한 믿음이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라고 말했다. 즉 교회의 기초는 인간의 권위가 아니라 신앙의 진리였다.


하지만 로마 교회는 5세기 무렵부터 이 구절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로마 주교가 제국의 중심 도시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자, 교회는 점차 로마제국식 중앙집권 구조를 닮아갔다. ‘로마 주교’는 ‘베드로의 후계자’로 호칭되었고, 다른 지역 주교들보다 우위에 서기 시작했다. 로마의 주교였던 레오 1세(440~461)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대리자’(vicarius Christi)라고 칭했으며, 이 표현은 이후 교황제도의 신학적 정당화의 핵심이 되었다. 그는 ‘베드로의 수위권’(primatus Petri)을 주장하며, 교황의 결정은 하늘의 결정과 동일하다고 선언했다. 이는 신적 권위를 인간 제도에 투사한 최초의 공식적 선언이었다. 이런 선언은 당연히 다른 주교들의 반발을 샀다. 모든 주교는 동등한 지위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가톨릭 교회 이외에는 누구도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마 주교는 스스로를 교황이라 칭하여 단순한 신앙의 수호자가 아니라, 신의 대리자로서 세속 군주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정점은 1302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교서 <Unam Sanctam>에 드러난다. 이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온다. “모든 인간은 교황의 권위 아래 복종해야 구원을 얻는다”(Porro subesse Romano Pontifici omni humanae creaturae declaramus omnino esse de necessitate salutis). 이는 교황권의 신성화를 넘어, 인간 제도가 곧 신의 질서로 동일시된 선언이었다. 그러나 이는 성경만이 아니라 교부들의 가르침에도 위배되는 주장이다.


이러한 신학적 왜곡은 단순히 제도적 오만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교만(superbia)이라는 근원적 죄악의 구조화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교만을 “신 대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랑”(amor sui usque ad contemptum Dei)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간의 공동체인 교회가 만든 인간 제도의 하나인 교황제에서 교황이 자신을 신의 대리자로 세우는 것은 본질적으로 신을 배제한 자기 숭배였다. 이후에 나타난 교황권의 역사에서 반복된 권력 남용, 면죄부의 상업화, 성직 매매는 모두 이러한 제도화된 교만의 실천적 결과였다.


무오류성 교리는 단순한 신학 논쟁의 결과가 아니라, 19세기 유럽의 정치·사회적 격변 속에서 탄생한 위기의 산물이었다. 프랑스대혁명(1789)의 충격은 교회에 치명적이었다. 혁명은 교황권의 세속적 권위를 무너뜨렸고, 봉건제의 붕괴와 함께 성직자 특권도 사라졌다. 이때에 많은 신부가 살해당하기까지 했다. 교회는 파괴되었다. 계몽주의의 합리주의, 근대 과학의 도전, 그리고 무엇보다 이른바 ‘세속주의’(laïcité)의 확산은 교회를 점점 더 시대와 사회의 변두리로 몰아넣었다. 이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근본적으로 방어적이었다. 1848년 혁명과 함께 유럽 전역에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가 확산되자, 피우스 9세 교황(Pius IX)은 세속 정부와의 타협 대신 ‘신적 권위의 절대화’로 맞섰다. 그래서 1864년 그는 회칙 <오류목록>(Syllabus Errorum)을 발표하여, 자유주의, 합리주의, 사회주의, 종교다원주의를 ‘현대의 오류’(moderni errores)로 규정했다. 그에게 근대화는 단순한 사상적 위협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당시 바티칸은 이미 이탈리아 통일운동(Risorgimento)으로 가톨릭 교회의 땅이었던 교황령을 잃어가고 있었으며, 교황은 사실상 로마의 한 구석에 갇힌 상태였다. 이런 정치적 고립 속에서 피우스 9세는 오히려 자신의 영적 권위를 강화하려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제1차 바티칸공의회에서 발표한 교의헌장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에서 주장한 교황 무오류성 교리였다. 이는 사실 세속적 패배를 신학적 절대화로 보상하려 한 시도였다. 그러나 사실 이는 게토화 되고 있던 가톨릭 교회의 생존을 위한 최후의 몸부림에 불과한 것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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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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