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교만이 저지른 죄악들

이단재판, 마녀사냥, 십자군 전쟁

by Francis Lee

기독교의 역사는 ‘진리의 독점’을 통해 신앙을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한 역사이기도 하다. 신앙이 순수할수록 관용이 깊어야 함에도, 교회는 오히려 그 반대로 걸어왔다. 그러면서도 기독교는 늘 자기가 박해받은 종교라는 점을 내세우며 그러한 죄악을 감추기에 급급해 왔다. 사실 성경에서 예수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남을 심판하지 말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라고 가르쳤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너희가 심판하는 그대로 너희도 심판받고,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 너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형제에게 ‘가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주겠다.’ 하고 말할 수 있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뚜렷이 보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낼 수 있을 것이다.”(마태 7,1~5)


그러나 교회는 이 말씀을 조직적 심판 체계로 변질시켰다. 진리를 수호한다는 이름 아래, 다른 사상·신앙·양심의 가능성은 ‘이단’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그 낙인은 단순한 신학적 판정이 아니라 죽음의 선고가 되었다. 특히 이단재판소와 마녀재판, 그리고 십자군 전쟁은 그러한 교만이 제도화된 세 가지 형태였다. 그 공통된 뿌리는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교회의 오만한 자기 인식이었다.


1. 이단재판


무엇보다 이단재판은 신앙의 이름으로 정죄된 이성이었다. ‘이단’은 본래 그리스어로 선택을 의미하는 헤레시스(αἵρεσις)에서 나온 말이다. 초기 기독교에서 이 말은 특정 교리적 입장을 구분하는 중립적 개념이었다. 곧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이 단어는 단순히 ‘다른 신앙적 선택’을 뜻한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정식 종교로 인정하고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가 기독교를 제국의 유일한 종교, 곧 국교로 선언한 이후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단’은 정통의 반대말일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국가 반역죄에 해당되는 대역죄로 변질되었다. 325년에 개최된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라는 주장으로 정죄받았다. 이리하여 아리우스와 그의 추종자는 단순히 신학적 논쟁에서 진 것이 아니라 역적이 되어 버렸다. 이 사건 이후 ‘신학적 논쟁’은 곧 ‘정치적 숙청’의 형태로 제도화되었다. 곧 ‘이단’은 더 이상 신학적 다양성을 의미하지 않고, 권력에 대한 저항자를 뜻하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교리 논쟁의 자유는 사라지고, 교회 권위에 대한 복종이 ‘진리의 척도’가 되었다. 이른바 정통은 승자의 논리가 되었고 이단은 패자에게 붙여지는 낙인이 된 것이다.


중세 교회의 이단 탄압은 12세기 알비파(Albigensians) 탄압에서 본격화된다. 알비파는 남프랑스의 카타리파(Cathars) 신앙운동으로, 청빈과 순결을 강조하며 부패한 교회를 비판했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3세(Innocentius III, 재위 1198~1216)는 그들을 “사탄의 종”으로 선포하고, 1209년부터 20년간의 이른바 알비 십자군 전쟁(Albigensian Crusade)을 명령했다. 그 결과 남프랑스의 도시 베지에르(Beziers)가 함락되고 약 2만 명이 학살당했다. 이때 교황 사절 아르놀두스(Arnaldus Amalric)는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아실 것이니”(Dominos suos recognoscet)” 모두 죽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이 사건은 단지 폭력의 비극이 아니라, ‘신앙의 이름으로 타자를 말살할 수 있다’는 교회의 논리가 제도화된 출발점이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Gregorius IX, 재위 1227~1241)는 1231년, 공식적으로 교황청 직속의 이단심문소(Inquisitio Haereticae Pravitatis)를 설립했다. 이는 오늘날의 재판제도와 달리, 피고에게 변호권이 없는 비밀재판이었다. 재판관은 대개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었고, 그들은 ‘신의 대리인’이라는 자의식 속에서 이른바 ‘이단자에 대한 고문과 자백 강요 그리고 처형을 순전한 신앙 행위로 여겼다. '고문을 통한 자백은 영혼의 구원‘이라는 어처구니없이 왜곡된 신학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였다.

13세기 이후, ‘이단’은 단지 신앙적 반역자만이 아니라 이성을 추구하는 사상가들에게도 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브루노(Giordano Bruno, 1548~1600)다.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하고, 우주가 무한하며 신은 만물 안에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마 교회는 그의 사상을 ‘범신론적 이단’으로 규정했다. 유일신론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기독교의 교리를 어긴 것보다는 교회의 권위에 맞선 것이 더 큰 죄, 이른바 괘씸죄를 저지른 탓이다. 결국 그는 1600년 2월 17일 그는 로마의 캄포 데이 피오리(Campo de’ Fiori) 광장에서 화형 당했다. 그가 했다는 마지막 말은 이렇게 전해진다.


“너희가 지금 불태우는 것은 내 몸이지, 내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서 폭행을 멈추지 않았다. 브루노 처형 33년 후,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도 괘씸하게도 교회가 진리로 내세운 천동설에 맞서 지동설을 내세운 이유로 이단심문소 앞에 섰다. 그는 지동설을 철회하라는 요구에 무릎을 꿇어 목숨을 부지했지만 재판장을 나서며 다음과 같이 속삭였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E pur si mu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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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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