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문 에세이 ]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고
당연한 듯 곁에 머물렀지만
한순간 불현듯 떠나갔다.
일찍 찾아온 사춘기로 비교적 빨리 이성에 눈뜬 소년은 같은 반의 한 소녀를 마음에 들어 했다. 첫눈에 반하거나 하는 그런 마법 같은 느낌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 소녀가 끌렸다. 그리고 친구를 통해 장난삼아 던진 고백이 13년을 함께하는 인연의 시발점이 될 줄 소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뜨겁고 치열하게 사랑했다. 13년이란 세월은 서로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만들었다. 하지만 스물아홉이 되는 해 사랑은 종착역에 다달았다. 느닷없이 찾아온 인연은 당연한 듯 늘 곁에 머물렀지만, 시절이 끝나자 거짓말처럼 그렇게 내 첫사랑은 끝을 맺었다.
[ 시절 인연과 현대인의 사랑 ]
사랑은 시절 인연에서 피어 나온다. 시절 인연이란 누군가를 원하는 내 안에 리듬이 다른 존재의 동일한 리듬과 조우하여 생겨나는 인연의 장이다. 이러한 인연의 장에서 서로의 육체와 정신이 감응하고 무르익어야만, 사랑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인연은 내가 누군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인연이 나를 선택하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인연장에 이끌려 누군가가 내 삶 속으로 들어오는 것. 그것이 곧 시절 인연으로 탄생하는 사랑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랑은 시절 인연의 리듬을 잃어버렸다. 학력이 높아질수록. 스펙이 쌓여갈수록. 재산을 늘려갈수록. 견고한 조건을 세우고 마치 쇼핑을 하듯 인연을 찾고 선택한다. 상대방을 고려하는 1순위는 꼴림이 아닌 조건이 되어 버렸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고 타인의 시선의 노예가 되어 연애와 결혼은 적어도 남들만큼은 해야 한다는 자의식으로 내 안에 리듬을 침묵시켜 버렸다. 자본과 미디어는 완벽한 이상향의 사랑과 결혼, 스위트홈에 대한 로망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결국 본능은 잠식되어 가고 소비와 이미지로 사랑을 도배한다.
사랑은 서로의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과정으로 인해 존재가 바뀌는 사건이다. 하지만 내안에서 솟구치는 꼴림이 아닌 허망한 이미지에 갇혀 누군가를 선택한다면, 그러한 존재는 일치될 수 없는 몸과 마음의 간극으로 인해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한 삶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 '이별' 필연적인 자연의 이치 ]
사랑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며 떠날 때도 이유 없이 떠나간다. 헤어짐에 이유는 없다.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표면적일 뿐! 그저 그와 나를 이어주었던 인연장이 그 운명을 다하여 시절 인연이 끝난 것이다. 인연이 끝난 후에도 미련에 얽혀 이별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서로에게 너무나 큰 고통이다. 부질없는 집착은 자신과 상대방을 모두 파괴하는 어리석은 결말을 만들어 낸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하며 시작하는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사랑 또한 반드시 마지막이 존재한다. 인연을 다함이든 생명을 다한 죽음이든, 이별은 어떻게든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생성과 소멸의 필연적인 이치이다. 사랑의 시작은 곧 이별의 시작이다. 그렇기에 인연이 끝나버린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회한은 할 필요가 없다. 자신이 사랑과 동시에 이별에 불을 지핀 셈인데 누구를 탓할 수 있으랴!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은 유한하기에 아름답다. 사랑 또한 동일하다. 하여, 그 한정된 시간 동안 찾아온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매 순간을 살아야 한다. 이처럼 온전히 겪어낸 인연과의 이별은 미련과 후회, 원망이 아닌 또 다른 가능성과 삶의 길을 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