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58.54km, 누적시간: 11시간 09분
표지사진: 서울시 후암동 ’좁은 골목길‘
두텁바위 마을, 용산구 후암동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6월 중순, 땡볕 거리를 벌써 5일째 쉬지도 않고 걷고 있다. 어떠한 둘레길도 아니고 공원도 아닌, 더더욱 흙길도 아니고 울퉁불퉁 보도블록 위를 온전히 걷는다. 특히 발목 움직임에 상당한 압박이 들어오는데, 유의하여 잘 걸어야 하는 이유다.
아직 초기라서 그런가? 마음이 많이 들떠 있다. 걷는다는 것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오랜만에 느낀다. 게다가, 어느 동네 하나를 샅샅이 탐방한다는 것은 ‘보물찾기‘ 같은 느낌이다.
초등학교 소풍날, ‘보물찾기’를 해 본 경험이 있는가? 그것은 아주 신이 나는 일이다. 나는 어렸을 적 학교에서 ‘헌인릉’으로 소풍을 간 적이 있었는데, 학생들 집합 장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미리 선생님들이 풀숲에 숨겨 둔 보물을(학용품) 엄마들이 몰래 살핀 후 제 아이들에게 일러 주고는 했다. 당시엔 염치없지만 학용품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선수 치듯 엿보기 경쟁도 심했는데, 나는 그 일이 매우 흥분되고 신이 났었다. 그리고 오늘이 딱 그런 기분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용산구 후암동(厚岩洞)이다. 남산을 등에 업고 용산 앞마당을 내려다보는 마을, 예부터 크고 둥근 ‘두텁바위’가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두터운 이 바위는 자손이 귀한 사람들이 찾아와 자손 얻기를 빌던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6월 중순으로 갈수록 태양은 높고 뜨거워진다. 전국적으로 흐리고 비가 온다면서 웬걸, 오늘도 한 낮 온도가 30도에 육박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기후이상현상이 우리나라에도 고스란히 오는 것 같다.
가벼운 배낭에 물을 두 개 정도 넣어주고 3년 전에 사서 한 번도 열어보지 않았던 운동화를 꺼내 신었다. 엄청 가벼운걸? 신발 위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통풍도 잘된다. 이 정도면 오늘 걷기는 대체로 수월 하지 않을까, 아주 오만이 방자하도록 길을 나섰다.
… 덥구나. 아… 덥다
시작부터 더웠다. 고개만 살짝 넘어가는데도 땀이 흐른다. 머리는 벌써 모자를 눌러쓰고, 땀을 흡수하기 위해 헤어밴드로 감 쌓다. 마포오거리에서 효창동 용머리 고개를 넘어 삼각지로 향하려다, 문득 효창공원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애당초 목적지만 있고, 어떻게 가는지는 별로 상관이 없었기에 수시로 방향을 바꾸었다. 걷기의 매력이다.
효창공원은 독립운동가 묘역이 자리한 곳으로, 대표적인 ‘백범 김구‘ 선생의 ‘백범김구기념관’이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 멀지도 않고 지근거리에 살면서도 참 무심했던 곳.
뜨거운 태양을 거슬러 하얗디 하얀 백범김구기념관 안으로 들어섰다. 굉장히 넓은 중앙 로비 한가운데에 백범 선생의 좌상이 있고, 그 옆에 몇 줄의 학생 여럿이 인도자의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근현대사의 역사적 배경과 대한 독립(만세), 그리고 6.25 전쟁까지 이어지는 스토리는 딱히 새로울 것은 없었다. 다만, 흑백사진의 투사들을 뚫어지게 보며 혼잣말을 한다. ‘많이 어리구나. 그 나이에 참 대단하다. 공부는 잘했을까?‘ 피식 웃는다. 공부라니… 그래, 그 정도 투지면 뭐든지 잘했겠지.
기념관에서 나와 숙명대학교를 거쳐 남영동, 그리고 삼각지를 통해 이태원 방향으로 길게 돈다. 이왕 걷는 거, 좀 더 많은 거리를 채우고자 일부러 이태원과 남산 둘레길을 따라 후암동으로 들어갈 예정이다.
남산 둘레길을 통해 경리단길, 그리고 해방촌을 거쳐 후암동으로 빠지는 길들은 다소 좁고, 높고, 험하다. 그 가장 높은 곳에 ‘보성여자고등학교’가 위치해 있는데, 부인들이 종종 말하는 언덕 위에 내 고등학교가 딱 이곳인 듯하다.
여러 갈래길들을 마을버스가 요리조리 잘도 다닌다. 걷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대부분은 차로 올라갈 것 같은 저곳을 나는 두 다리로 터벅거리며 간다.
뜨거운 열기가 발끝을 타고 무릎에서 멈춘다. 이미 내 등뒤로 내리쬐는 태양열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무릎에서 발끝의 열기와 마주친다. 그럼에도 무릎은 이상할만치로 차갑다.
낯선 곳에서 동네 간판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면 거기서부터 ‘보물찾기’가 시작된다. 오래된 미용실과 이용원, 그리고 식당 간판들. 특히 작고 소박하지만 재밌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법한 식당은 놓치고 싶지 않다. 그 끝에서 마주친 ‘남산 밑 유부‘라는 식당은 언젠가 꼭 가 보고 싶어서 깊이 메모를 해 두었다.
후암동 좁은 골목을 여기저기 후벼 다녔다. 골목 사이사이로 옛 건물과 새 건물이 조화롭지만, 대체로 낡고 낮은 집들이 많은 편이다.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도로로 이어지는 ‘대문 밖 벽에 붙어 있는’ 의자들을 보게 된다. 주인이 없는 의자와 또 그 문 앞 돌덩이에 다리를 포개고 쪼그려 잡담을 나누는 동네 어르신들이 내 어릴 적 기억 속으로 아득하게 밀려 들어온다.
흰 머리카락이 가득한 어느 노파는 내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아 대문 안쪽으로 소쿠리를 들고 파를 다듬는다. 그리고 가끔 뒤돌아 밖을 보며 누군가에게 뭐라 뭐라 소리를 내뱉는다.
낯선 동네의 이런 풍광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어쩌면 이곳이 내 기억 속의 고향집과 다를 바 없어서 인지. 한 폭의 그림으로 남기고 싶을 정도로 눈 속이 아련하다.
후암동 골목을 내려와 서울역으로 빠져나간다. 오후 늦은 시간까지 걷다 보니 날은 더욱 흐려져 있다. 비가 온다더니 이제야 멀리 구름 하나가 먹을 잔뜩 지고 있다. 서울역 염천교를 넘어가는데, 늦은 나팔꽃 여럿이 흐드러지며 배웅을 한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