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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건달 Mar 20. 2024

FW #1, 이태원(18.74km)

누적거리: 18.74km, 누적시간: 2시간53분

표지사진: 서울시 이태원1동, ‘해밀턴호텔 뒷 길’


집에만 있지 말고, 좀 나가지?


아내가 눈을 흘긴다. 징그럽고 지긋지긋하다는 느낌으로 한 마디를 ‘툭!‘ 던진다. 싸늘하다. 나는 이미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끝까지 아무 소리 없기를 바랐다.


23년 5월과 6월은 '부처님 오신 날'과 '현충일' 사이로 징검다리 휴일이 많은 달이었다. 계획이 없는 나는 휴일 내내 게임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밤새도록 공포게임 두 개를 20시간과 17시간 내리 달리고 있었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몰아쳐서 보듯, 그동안 쌓인 숙제를 풀어야만 했다. 결국, 아내의 한마디에 게임기를 손에서 놓았다.

The Evil Within 2(발매:2017.10.13, 제작:Tango Gameworks), 언제적 게임이냐? 드디어 숙제를 끝냈다


알았어! 같이 바람이나 쐬자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나왔지만, 목적지가 따로 있지는 않았다. 아내와의 산책이었으니까. 얼마나 걸었을까? 아내가 힘이 든단다. 졸립덴다. ‘뭐야… 벌써?’ 겨우 몇 백 미터를 걷더니, 먼저 들어가겠단다. 들어가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길로 혼자 오래도록 걸었다. 왜 그랬을까? 정말 찰나의 선택이었다. ‘그냥 걸을까?’ 생각했던 것이, 지금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가벼운 반바지 차림이었다. 여차하면 도서관이라도 가려고 책가방 하나 메었고, 다행히 슬리퍼는 아니었다. 따로 정해진 곳 없이, 그냥 발길 가는 데로 걸었다.


마포에서 공덕을 지나 효창공원앞역으로. 그리고 다시 삼각지를 걸어 전쟁기념관 앞을 지나갔다. 여기까지 오는 데에만도 4~5킬로가 되었다. 다소 덥고 발목이 쉬었지만 기분이 좋았다. 계속 걸었다.

공덕 오거리를 지나 효창공원앞역, 그리고 삼각지로 넘어가는 ‘삼각지고가차도’ 아래로 남산타워가 보인다


이태원까지 왔다. 주춤했다. 이태원이라니. 사실 22년 10월 말, ‘이태원 할로윈 참사’ 이후로 이곳엘 온 적이 없었다. 궁금은 했지만 왠지 숙연해지는 동네가 되었다. 길을 걸으면서도 흘끔 사람들 표정을 보게 된다.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일부러 염탐하러 온 것도 아닌데 하면서 걸었다.


현장까지 오니 마음이 더욱 가라앉는다. 골목을 쳐다보면서 ‘저 좁은 길에 얼마나 사람들이 많았으면, 어떻게 부대꼈으면’ 하면서 바라본다.


벽 면 한쪽을 가득 채운 포스트잇 메시지들. 하나하나 자세히 읽을 자신이 없었다. 아직까지 남아 있는 헌화 꽃송이에 대고 나지막이 무언가를 읊조린다. 뭐라도 해야 될까 싶어, 명복을 빌고 유가족들의 안녕을 빌었다.

이태원 압사 사고가 있었던 해밀턴 호텔 옆 골목. 벽에 붙어 있는 수 많은 포스트잇, 글 하나하나 읽기가 참 힘들다. 마음이 아프다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을 따라 위로 올라간다. 사람들이 다소 있다. 어쩌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로 밥집도 열었고, 냄새도 풍미(風味)에 가깝다. 예전 같지는 않지만, 예전에 가까워지려 노력하는 모습이 좋았다. 이태원의 멋과 향기를 잃지는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계속 걷는다.


이태원은 두 가지 문화가 존재한다. 꽤나 힙하거나 꽤나 진중하거나. 이태원 해밀턴 호텔 뒤쪽으로는 한쪽에서 보면 2층집인데 반대편에서 보면 4층인 고급집이 잔뜩이다. 우리가 잘 아는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집도 있고, SK 최태원 회장집도 있다.


곳곳에 대사관이나 대사관저가 보이고, 이 골목들은 걸어서 다니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한적하다. 한남동 UN빌리지 골목과 비슷하다.


조용하지만 삭막한, 비탈길이라 홍수가 와도 전혀 피해가 없을 듯한 고지대에 자리한 그들은, 꽤나 나와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이태원 건너, 보광동 방면으로는 굉장히 또 복잡하다. 상대적 박탈감이 있을 정도로 낮은 동네에 낮은 집들이 잔뜩이다.


골목에는 술집과 카페, 옛날 양옥집들이 많다. 대체로 빌라가 자리하고는 있지만, 각 원룸마다 사연 많은 각양각색의 외국인들이 많다. 그들은 일하러 오거나 공부하러 왔겠지만, 어느새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태원 주민이 되어버렸다. 그들의 힙한 문화가 반대편 진중한 문화와 어우러지는 유일한 지역이 이태원이다.


25년 전에 용산구역 내 대사관•저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이태원과 보광동, 그리고 동빙고동과 한남동으로 이어지는 곳곳에 대사관이 많다. 그 대사관 경비를 서며 군생활을 한 터라, 이 지역 골목골목을 잘 아는 편이다. 그 기억을 안고 오랜만에 걷다 보니 감회가 새롭다.

보광동 골목은 삶이 그대로 묻어있다. 25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따듯했던 인심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이태원을 지나 보광동까지, 그리고 강변북로를 따라 이촌으로 향한다. 보광동에서 이촌동으로 향하는 길을 굳이 걸어갈 일은 없었다. 용산가족공원도 처음 지나가 보고, 그러나 자주 갔었던 국립중앙박물관도 오랜만에 들러 본다. 관람이 목적은 아니었기에 대충 둘러보고 나온다.


이제 용산역으로 향하는데 다리가 꽤나 아프다. 첫 걷기를 10킬로 넘게 했으니 발등도 놀랬나 보다. 생채기 없이 주는 고통은 골절인가? 생각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용산역까지 왔다.


용산역은 요 몇 년 사이에 최첨단 도시로 변하고 있었다. 마천루가 너무 좋은 빌딩들이 꽤나 들어섰고, 앞으로도 초고층 건물들이 계속해서 지어질 것 같다.


용산역 뒤로는 오십만 평에 달하는 ‘용산 미니 신도시가’가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뜨거운 여름을 앞두고 그래도 바람이 불어 걸을만하며, 볼만했다.

용산가족공원을 거쳐 용산역, 원효로2동으로 빠져 강변북로를 타고 마포역으로 돌아가는 길


걷기를 통해 사물을 보고 감정을 느끼는 시간이 참 좋았다. 이 생각을 오랫동안 간직하려다, 계속해서 쌓아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예상치 못하고 계획하지 않은 ‘날 것이 주는 행복’. 그래서, 나는 오늘부터 걷고 생각하고 글을 쓰기로 했다.


- 끝

마포 > 효창동 > 삼각지 > 이태원 > 보광동 > 이촌동 > 용산역 > 마포로 이어지는 총 18.74km, 19,125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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