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211.72km, 누적시간: 42시간 30분
표지사진: 서울 논현동 ‘교보타워사거리’
아빠, 걸으러 나갔다 올게!
가족 모두 늦잠에 빠져 있는 일요일 아침. 나가면서 속삭이듯 ‘다녀올게’ 말은 했지만, 글쎄...‘누가 잘 들었을까?’ 사실 아무도 듣지 못했으면 좋겠다. 아내의 잔소리를 안고 밖을 나간다는 것이 여간 부담이 아닐 수 없으니까. 가족들을 뒤로하고 혼자 돌아다니는 걸, 어느 누가 좋아할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23년 6월 25일, 서울은 하루 낮 최고 기온이 33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역대급 더위가 온다는데, 여름이 채 시작도 하기 전에 날씨는 푹푹 찐다. 나중에 알았지만, 6월 이 정도의 기온은 8월 날씨에 비하면 봄이었다. 정말, 역대급 여름이 오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역삼동이다. ‘마포에서 역삼이라니!’ 평소에는 걸어서 갈 생각을 전혀 못 해본 거리이다. 실제 거리는 12km에 불과하지만, 체감상 너무 멀어 보였다. 보통 마포에서 역삼동까지 가려면 아주 길게 도는 버스(740번) 하나를 타거나, 대부분 두 번씩은 갈아타야만 갈 수 있었으니까.
나는 역삼동 가는 길에 오늘 꼭 두 가지를 먹어봐야겠다. 하나는 서울에서 가장 맛있는 떡볶이집 중 하나라는 강남역의 ‘예쁜 할머니네 떡볶이’와 그리고 내가 가끔 외근 나가다 점심을 먹고는 했던 역삼동의 ‘제주은희네해장국’ 집이다.
먹을 목적으로 걸어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다리에 날개를 단 듯하다. 최근에 본 떡볶이 맛집 관련 책에서 서울 시내 몇 군데 유명한 집을 점찍어 두었다.
그래, 여기 여기를 찾아가는 거야. 그리고 물론 나는 거기가 어디든 걸어서 가야지? 맛을 본 다음 팩트 위주로 맛 리뷰를 하는 거야.
걸어가는 재미와 먹는 재미도 있고. 벌써부터 그런 생각에 마음이 두근두근했다. 생각만 해도 참 즐거운 일이다.
마포역에서 한강공원으로 빠져 마포대교, 원효대교, 한강철교, 한강대교, 동작대교 그리고 반포대교까지 6개의 한강 다리를 지난다. 그리고 잠수교를 건너 서울고속터미널에서 논현동으로 이동 후, 다시 강남역, 역삼동으로 넘어가는 코스다.
하늘에 구름이 가득하다. 습한 기운에 후텁지근하다. 마포 한강공원으로 나와 원효대교를 지나는데, 자전거를 한켠에 세워두고 낮잠을 즐기는 호인의 풍경이 한가롭고 정겹다. 평소 울퉁불퉁 서울 시내를 걷다가, 오늘처럼 공원 흙길이나 정돈된 길을 걸으니 편안하다. 가는 길, 6월에 피는 ‘금계국’도 화려하게 맞아주니 천상(天上)이 따로 없구나.
매일 걷기 시작한 지 20여 일이 되었다. 하루도 안 빠지고 평균 10km를 걸었더니 누적 200km가 되어간다. 갑자기 오래 걸을 때 오는 증상이 있다. 제일 먼저 왼발 통증으로 시작하여 오른발로 이동을 했고, 발바닥보다도 발등에서 발가락까지 뼈마디 하나하나가 쑤시고 저린 증상이 왔다. 그렇게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더니 며칠 지나 모든 통증이 사라진 걸 보면, 일종의 오래된 피가 한 바퀴 돌고 새 물로 채워진 기분이었다.
걷기가 등산보다 좋은 것은, 심하게 힘들거나 몸에 큰 무리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처럼 오래 걸을수록 마모(磨耗)는 심하겠지만, 적당한 걷기는 최상의 운동이다. 전문가는 하루 1시간, 5~6km를 꾸준하게 걷는 것을 추천한다.
걷다 보면 좋은 것 중 하나가, 사물을 자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녹슨 철물, 알 수 없는 꽃, 뜯겨진 도로와 이정표 그리고 각양각색의 사람들. 마주 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다양한 삶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어린아이들부터 노인들까지, 얼굴과 그들의 체형에서 살아온 인생이 엿보인다. 그리고 나를 비교하여 내 삶을 추적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생각의 깊이에 빠져 먼 사색을 하고 돌아온다.
반포대교 가까이 오니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잠수교의 양방향 교통을 통제하고 ‘2023 차 없는 잠수교 뚜벅뚜벅 축제’ 행사를 하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다리 위로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또는 각종 액세서리 가게와 먹거리를 즐기고 있다. 그 모습이 참 좋았다. 나도 걷기를 잠시 멈추고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만난 풍류를 즐겼다.
계획을 수정했다. 반포대교 남단에서 시내로 접어들지 않고 한강을 따라 그대로 한남대교까지 걸었다. 잠원한강공원으로 나와 신사동 가로수길의 유명한 빵집, ‘에뚜왈’로 향했다. 이따가 돌아가는 길에 빵이라도 들고 가면 참 좋아라 할 것 같다.
에뚜왈 가로수길점
빵집은 조그맣다. 사람들은 길에서도 빵집에 들어가려 줄을 선다. 비좁아 한꺼번에 들어갈 수가 없으니 순서를 지킨다. 빵은 붉은 갈색으로 가득하고 향은 동네 꽃보다 진하다
- 신사역 8번 출구, 620M
신사동 가로수길이 예전만큼 사람들로 북적이지는 않았다. 코로나 3년 동안 문화가 바뀌고 사람들의 모임 장소가 바뀐 것 같다. 하긴, 요즘 연남이나 성수, 문래동을 가 보면 확실히 트렌디하고 세련된 감성이 아주 매력적인 동네로 탈바꿈하였다. 어쩌면 홍대나 신촌, 특히 이대 앞은 상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이미 핫플 세대교체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신사를 지나 논현, 그리고 강남으로 빠져나오니 또 복작거린다. 예정했던 ‘예쁜 할머니네 떡볶이’ 집은 정말 예쁜 아주머니가 주인이시다. 도저히 할머니 같지는 않은데, 결혼을 일찍 하여 진짜 할머니가 되셨거나 또는 그냥 이름만 할머니일 수도 있겠다. 얼른 포장만 하고 역삼으로 건너간다.
예쁜 할머니네 떡볶이
떡볶이는 정말 맛있었다. 따로 건물이 있는 가게가 아니고, 언제든지 이동이 가능한 트럭에서 장사를 하신다. 간이 생각보다 아주 세지 않고, 달달하며 사장님은 정말 친절하시다
- 강남역 9번 출구, 45M
한낮의 해는 벌써 저물고 있었다. 배도 꼬룩꼬룩 한 것이, 한 끼도 먹지 못하고 걷기만 했더니 난리다. 조금만 기다려라. 결국 ‘제주은희네해장국’ 밥 한 그릇 먹으로 역삼까지 걸어온 셈이다. 맛은 아주 좋지. 꿀맛이지. 그런 거다. 힘들지만 보람 있고 너무 배고파서 최고로 맛있는 밥을 먹게 된 셈.
제주은희네해장국 강남역점
정말 해장국은 매우 유니크하고 맛있다. 다른 선지해장국과 다른 점은 대파와 마늘이 많이 들어간다는 것. 그리고 ‘양’과 ‘선지’는 매우 정갈하다. 최고!
- 강남역 1번 출구, 역삼 방향 200M
아침인 듯 점심인 듯, 그러나 저녁밥이 되어버린. 정말 하루가 뚝딱 흘러 역삼동 고개로 해가 떨어진다. 아… 너무 멀리 왔는데? 아내한테 뭐라 말할까. 빵과 포장한 떡볶이를 들고 돌아가는 길, 740번을 타고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어느새 잠이 들어버렸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