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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포건달 Apr 10. 2024

FW #7, 필동(12.02km)

누적거리: 271.2km, 누적시간: 54시간 37분

표지사진: 서울 예장동 ‘남산공원 봉수대’ 앞


23년 7월 1일. 오늘도 ‘폭염주의보’가 발효 중이다. 걷기 시작한 지 6월 한 달이 지났고, 26일째이다. 매일 쉬지 않고 평균 10km 이상 걸었다. 하루 생활 걸음까지 합치면 대략 13~14km를 걸은 셈이다.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낯선 동네가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처음 가 본 길도, 첫걸음 같지 않다. 집과 골목들, 가게 간판들도 서로 비슷해서 식상해지기 마련인데, 그래도 그 동네만의 특색을 찾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가끔 보물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발소가 그렇다.

동네마다 이발소 하나쯤은 있잖아. 그런데 그 오래되고 낡음이 너무 좋은거야. 머리만 길렀다면 밥 먹듯 들러 머리를 깍고 싶어. 이발소는 항상 TV가 켜져 있지. 소음이 멋지지.


그래서 처음 가 보는 길은 일부러 천천히 걷는다. 그 땅을 내 발에 담으려 노력하다 보면, 오랜 삶을 쌓아 온 동네의 이야기가 내 에어팟 음악과 함께 섞이고 섞여 진한 향취(香臭)를 남긴다.



오늘은 마포 ‘경의선숲길’을 산책하듯 걷다가 ‘남산 둘레길’로 발길을 돌렸다. 날씨가 정말 쨍쨍하다 보니, 그늘진 둘레길이 더욱 생각나는 거다. 더운 날에도 오랜동안 걸을 수 있는 곳이 바로 ‘남산 둘레길’이다.

남산둘레길
남산 N타워를 중심으로 약 9.8km의 산책길로 구성되어 있다. ‘남산순환나들길’ 또는 ‘남산순환산책길’로도 불리는데, 한양도성성곽과 이어지며 역사적으로도 꽤나 오래되었다.

남산타워가 일반인에게 공개된 1980년도부터 많은 시민들이 애용해 온 길이며, 지금같이 15개의 진입로가 갖추어진 둘레길은 2015년도에 공사를 마치었다.

남산둘레길 안에는 여러 명소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제갈공명 사당인 ‘와룡묘’가 특이하다.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 5호이며, 2m가 넘는 제갈공명과 관운 장의 석고상이 있어 중국 신앙과 한국 토속신앙이 섞여있는 독특한 문화를 느낄 수 있다.


매일 퇴근길에 을지로 회사에서 남산을 올라 돌고 내려와 집으로 귀가하고는 했다.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니지만, 여름 열기로 인해 후텁해지고 온 몸이 땀으로 줄줄 흐른다. 그러다 보니 퇴근길에는 평상복을 운동복으로 갈아입어야만 했고, 항상 출근복장은 운동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이 되었다(출근 엘리베이터 안에서 양복쟁이 틈바구니에 끼어 있으면, 이 친구가 여기 직원인가 싶을 정도로 눈길을 끈다)


서울의 많은 둘레길 중, 나는 ‘남산 둘레길’을 최고로 친다. 일단 둘레길의 역사가 길고 그래서 시설은 꽤나 잘 정비되어 있다. 뛰는 사람, 걷는 사람, 때로는 자전거 도로와 이어져 다방면으로 둘레길을 이용할 수가 있다. 게다가 여차하면 남산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고, 그렇게 내려다보는 서울 시내 경치는 환상이다.

날씨가 좋아서 서울 시내가 창창하게 보인다. 시내는 여름 열기로 부글부글할게다. 남산타워와 저 빌딩 어느 꼭대기에 ‘짚라인’이 연결되어 있다면 얼마나 신날까?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남산 둘레길을 돌아 국립극장과 반얀트리호텔 쪽으로 빠져나왔다. 마포 집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반얀트리 호텔을 바라보고 왼편 충무로와 오른편 이태원 쪽이 있는데, 오늘은 충무로에 위치한 필동(筆洞)으로 가 보기로 했다.

필동의 동명 유래는 조선시대 이 마을에 남부의 부사무소(部事務所)가 있어 ‘부동’(部洞)으로 부르다 와전되어 ‘붓골’로 바뀌었고, 이 ‘붓골’을 한자로 표기해 ‘필동’이 되었다. - 위키백과
오후 7시가 넘었는데도 늦은 시간까지 국립국장 안마당에는 시민들의 춤사위로 흥겹다.


필동에는 우리 딸아이가 태어난 ‘삼성제일병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국내에서 가장 큰 여성병원이었고, 첫째가 동네 병원에서 유산을 맞이한 터라, 절대 동네 개인병원은 안 가겠다고 해서 선택한 병원이었다.


2018년에 재단 이사장의 횡령과 무리한 병원 증축으로 경영난이 심화되어 결국 파산을 선고하게 되었고, 이후에 영화배우 이영애가 병원 인수에 참여한다고 했었는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삼성제일병원’이란 이름은 사라지고, ‘제일내과‘가 자리하고 있다.


날이 벌써 어스름해진다. 큰길을 두고 필동의 작고 낡은 골목을 따라 걷는다. 근처마다 적막하고 문 닫은 술집들이 듬성듬성 보인다. 그래도 한때는 영화산업의 메카였었는데, 지금은 그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일요일 저녁 필동 골목은 한적하기보다는 을씨년스럽다.


근처 동국대학교 후문이 필동과 이어지고 충무로역까지 오게 되면 그래도 다소 사람들이 많아진다. 필동에 아주 유명한 냉면집 ‘필동면옥‘을 지나가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필동면옥’은 한 번 먹어봐야겠지?‘ 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저녁 시간이 한참을 지났는데도 사람들의 대기줄이 길다.


매장 안은 손님들로 북적대고 마지막 저녁 오더를 받는다고 한다. 다행히 주문을 하고 냉면을 받을 수 있었다. 가격은 금값이다. 5분이면 먹을 수 있는 냉면 한 그릇이 14,000원. 순환도 빠르고 손님들은 금방 또 채워지지만, 내 배는 이 한 그릇으로 절대 채워지지 않았다.

필동면옥은 ‘평양식’이다. 새콤하고 면발이 얇은 함흥식과 달리 밍밍하다, 하지만 몇 번을 반 강제로 먹게되면, 어느 날 잠자려 누운 방 천장에서 평양냉면이 아른아른 날라다닌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이제야 제대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하루종일 걷는다는 것이 어쩌면 내 휴식 시간을 통째 가져다 받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매일 같이 쌓이는 피로가 금방 풀어지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걸으면서 옛날 음악도 듣고, 유튜브를 통해 경제 방송도 청취하다 보면 세상의 감성과 지식을 쌓는 것이 꽤나 유익하다.


돌아가는 길에 잠시 을지로에 들러 아내와 딸이 좋아하는 빵을 샀다. 마지막 재고라 원하는 제품은 없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이 행복했다.


- 끝

남산둘레길 > 필동 > 충무로 > 을지로로 이어지는 총 12.02km, 걸음 수 15,873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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