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적거리: 356.96km, 누적시간: 58시간 22분
표지사진: 경기도 구리시 왕숙천로 ‘구리타워’
날씨가 흐린 것이 종일 비가 퍼부을 듯한 기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오늘도 나의 목적지를 향해 걸을 모양새로 주섬주섬 가방을 쌌다. 물론 ‘우비’도 챙겼다.
정말 미쳤구나? 거기가 어디라고!
아내가 평소보다 눈을 더 흘깃했다. “아니, 오늘 비가 장대처럼 내린다는데, 작작 좀 하지?“ 따로 대꾸는 하지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뭐, 알지. 작작해야 하는데, 난 오늘 꼭 거기를 갈 거라고. 그리고 미리 봐 둔 찜질방도 갈 거야. 만화책이 가득한 곳인데, 완전 천국이지 않겠어?’ 아내는 나중에 천국을 가기 위해 오늘 성당엘 가고, 나는 그냥 오늘 천국에 갈 생각으로 희희낙락했다. 인생이 묘하다.
오늘 목적지는 ‘구리’다. “와! 구리라고?” 마포에서 구리까지 걷는다 하니 다들 ‘한소리’ 한다. 근데 가만히 따져보면, 거기까지 직선거리는 고작 22km인걸? 내가 그동안 걸었던 기록들을 보면 22km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마포에서 구리라고 하니까, 아주 멀게만 느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근데 말이지, 종국에는 정말 힘들기는 했다.
구리시를 딱히 가 볼 일은 없었다. 10년 전, 회사 동료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구리에 있는 한양대병원 장례식장에 가 본 정도? 아무튼 그때 기억에도 마포에서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어렵게 갔었던 기억이 있다. 워낙에 친해서 발인날까지 3일 연속으로 갔는데, 구리시의 첫인상이 마냥 밝지는 않았었다.
자동차를 타고 강변북로를 따라 서울에서 구리시로 빠질 때 항상 보이는 간판 중 하나가 ‘고구려의 기상, 구리’이다. 당최 고구려와 구리가 무슨 관계인가 했는데, 마케팅의 일종이란다. 물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구리와 광진구 사이에 있는 ‘아차산’에서 고구려 유물이 종종 발견된다고 한다. 그리고 ‘구리’라는 명칭은 고구려의 비슷한 어감에서부터 출발했다.
구리시(九里市)는 동쪽과 북쪽으로 남양주시, 서쪽으로 서울 노원구·중랑구·광진구, 남쪽으로 한강을 사이로 서울 강동구와 접한다. 서남쪽에 아차산(297m)과 용마봉, 북동쪽에 검암산이 있어 구릉지를 이룬다 - 네이버
하늘 위로 구름이 낮고 짙게 깔려 있다. 구리까지 도보로 걸으려면 아무래도 서울 사대문을 통해 중랑구로 빠져 망우리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흙길은 없고 온통 보도블록이며, 수많은 신호등을 거쳐 가는 길이라 쉽지 않다.
마포에서 종로 사대문으로 가는 방법은 크게 아현 방향으로 충정로, 광화문으로 가거나 또는 만리동고개를 넘어 서울역, 남대문을 통해 이동할 수가 있다. 오늘은 만리동고개를 넘고 ‘서울로’를 건너 명동에서 종로 방향으로 걷기로 했다.
일요일 오전이고 날씨가 흐려서인지 ‘서울로’ 공원에 사람이 거의 없다. 덥기도 하겠거니와 딱히 일부러 찾아오고 싶은 공원이라 보기는 어렵다. 차라리 교통 편의로 보면 ‘서울로’가 공원이 아닌, 이전 ‘고가도로’였을 때가 훨씬 편하기는 했다.
역사적으로 서울시장마다 대표적인 건설 업적이 있는데, 이명박 시장 시절에는 ‘청계천 복원’, 오세훈 시장 시절에는 반포대교 ‘세빛둥둥섬’, 그리고 故 박원순 시장 시절에 ‘서울로’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서울로’의 이로운 점을 딱히 모르겠다.
보도블록을 걷다 보면 블록이 깨져 울퉁불퉁한 곳도 많고, 특히 큰길을 건널 때마다 신호등이 맥을 끊기도 해서 걷기가 쉽지 않다. 잘 걷다가 멈추는 것이 익숙지 않아서 처음에는 인생철학처럼 ‘우리 생엔 쉼도 필요해‘라며 신호등을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제길… 그냥 멈춤 없이 쭈욱 걷는 게 최고다.
서울 도심 한복판을 걷다 보면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자주 발생한다. 요리조리 피하는 것도, 한눈팔지 않고 물웅덩이를 밟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매연 때문에 마스크도 필수이기는 한데, 너무 덥고 땀이 흐르다 보면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마스크를 벗게 된다. 누군가는 걷기 운동이 오히려 건강을 해치는 이유가 매연이라는 말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최대한 폐를 몸속 깊이 감추고 숨도 최소한으로 쉬면서 걷는다. 그런다고 매연이 안 들어 올리는 없지. 매연이 웃는다.
종로를 지날 때쯤, 잠깐 해가 반짝이더니 제기동과 청량리를 지나면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얼른 우비를 꺼내 입고 비를 헤쳐 걷는다. 하지만 이마저도 소용없는 것이 상봉역을 지나면서부터는 장맛비가 미친 듯이 퍼 붓기 시작했다. 우비는 전혀 제 기능을 못했고, 우르르 쾅쾅! 천둥과 함께 번갯불 한 줄기가 저 멀리서도 싸늘하게 나를 향해 내리친다. ‘이러다 길가에서 감전되는 거 아냐?‘ 걱정이 되기도 했다. 길 가던 사람들이 쳐다보는데 완전 미친놈이 따로 없어 보였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를 맞고 걷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너무 좋았다. 비를 맞고 걷는다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어렸을 때 일부러 비 맞고 다녔던 기억들, 군 시절 훈련 중 폭우에 그대로 노출되었던 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 온몸의 열기와 세상의 근심이 다 씻겨 내려가는 듯했다. 이 기분을 어떻게 글로 담을 수 있을까.
‘한낮에 세상의 모든 물줄기가 내 머리 위로 폭포처럼 떨어지는데, 앞은 안 보이고 모든 소리는 빗소리에 잠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온통 시원해지면서 세상 행복한 빛줄기를 다 가진 기분이랄까? 한 바가지 물줄기가 함박 빛줄기로 쏟아진다.’
망우리고개를 넘어 서울시와 구리시 경계에 접어들면서, 나는 내 목청껏 소리를 질러댔다. 노래를 불러도, 물장구를 쳐도 보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나이 많은 이가 가장 어린 모습으로 세상을 다 가질 듯할 때쯤, 드디어 구리시가 보이기 시작했다.
구리 ‘다산 신도시’까지 걸어가는 중에 비는 어느새 그쳤다. 몸의 열기 때문인지 김이 모락모락 난다. 운동화도 양말도 물에 젖어 묵직하다. 발걸음이 천근같이 무거워졌다. 터벅터벅도 아니고 ‘철푸덕 터벅, 철푸덕 터벅’ 거리며 물 반, 신발 반으로 고구려 땅을 밟아갔다.
구리역을 지나 왕숙교를 건넌다. 왕숙천? 처음 보는 구리시 냇가가 좋았다. 그 다리 위 일직선으로 나팔꽃이 만발하여 ‘이제 다 왔으니 조금만 더 힘내’라고 응원한다. 다산 신도시 안에 있는 ‘스파디움 24’를 향해 마지막 있는 힘을 다한다. 옷을 훌러덩 벗고 찜질방에 들어서는데, 마침 성당을 다녀온 아내에게서 안부 전화가 왔다.
어디쯤이야? 구리는 잘 도착한 거야?
아니, 여기 구리 아니야. 천국이야.
너 대신 왔어.
돌아가는 길은 버스를 타더라도, 나는 여기서 한참을 있다가 들어갈 테다. 구리, 정말 좋구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