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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으로 출근하는 여자들

프롤로그

by 씨네진

나이가 들수록 사랑할 것들이 점점 줄어든다. 가족에 대한 무한한 사랑은 유한함으로 끝나고, 남은 애정은 바닥나 가슴을 파도 나오기 힘들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멀어지기도 하고, 어느 순간 경계조차 희미해진다. 그러다 보면 과거가 친구가 되고, 현재는 자꾸만 멀어진다. 점점 호기심은 사라지고, 감각이 소진된 우아한 지루함이 찾아온다. 그 무렵부터 늙음의 냄새가 서서히 몸을 감싸고, 무서운 고독의 시간이 다가온다.

인도 영화〈런치박스〉에서 은퇴를 앞둔 주인공 사전은, 우연히 잘못 배달된 도시락을 통해 한 여인을 알게 된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옷을 단정히 차려입던 어느 날, 사전은 문득 자신에게서 ‘할아버지 냄새’가 나는 것을 느끼고는 만남을 주저한다. 이 장면은 단순히 ‘나이 들었구나’ 하는 자각을 넘어, 시간이 무심히 흘러간 뒤에야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상실감을 전한다. 늙음이 체념과 주저함을 데려오는 불청객이라면, 그것을 밀어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 나아가 영혼까지 돌보는 온전한 삶—참살이—가 절실해진다.

‘내가 사랑할 것을 다시 찾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무엇을,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관계의 복잡함에 지칠 때, 예술과의 관계 맺기를 선택하는 삶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다. 예술 작품은 내가 좋아하면 언제나 조건 없이 내 앞에 존재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작품이 우리에게 선뜻 다가오는 일은 드물다. 작품과 친해지려면 그 속으로 조금씩 발을 들이는 연습이 필요하다. 이해하려 애쓰다 보면, 어느새 감동이 시작되고,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자라난다. 오랜 시간 편지로만 사랑을 나누던 연인들이 결국 서로를 그리워하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그 그리움이,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예술이 우리의 손을 잡아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평균 나이 55세 여성들이 14일간 파리로 자유 예술여행을 떠났다. 여행의 주인공들은 대체의학 대학원생, 은퇴한 교사, 예술 교육 전문가, 그림책 강사, 스피치 강사, 영화 인문학 강사 등 제각각 다른 일을 하지만, 수년째 함께 인문학을 공부해 온 도반들이다.


나는 코로나 팬데믹 동안 영화 인문학으로 줌 강의를 시작했다. 이후 ‘영화로 읽는 화가 이야기’라는 프로그램을 열어, 예술과 관계 맺기를 시도했다. 우리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늘 직접 그림과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있었고, 이 간절함은 팬데믹 이후 ‘예술 여행’이라는 새로운 도전으로 이어졌다. 첫 번째 목적지는 바로 파리 미술관이었다.


여행의 이유는 각기 달랐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떠난 이도 있었고, 미술관에서 예술 작품과 마주하며 새로운 영감을 얻고자 한 이도 있었다. 단순히 유명한 그림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가의 영혼과 대화를 나누고, 그 과정에서 치유를 경험하고 싶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주인공 길은 과거의 예술가들과 대화를 나누며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다. 과거를 동경하는 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진정한 가치는 지금 우리가 서 있는 현실 속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파리 여정도 그와 닮아 있었다. 파리의 골목과 미술관에서 우리는 그림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었다.

루이뷔통 미술관에서 우연히 마주친 마크 로스코의 기획전은 깊은 울림을 남겼다. 시대별로 구성된 전시 속에서 특히 ‘레드 시리즈’ 앞에 섰을 때, 나는 그의 붓 끝이 아닌 영혼의 숨결로 그려낸 듯한 붉은 물감 너머에서 깊은 슬픔을 마주했다.


그의 ‘레드’는 죽음에 이르게 한 절망을 품고 있는 동시에, 예술을 통해 인간이 품을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의 불씨 또한 담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죽음의 기록처럼 느껴졌고, 그 앞에 선 우리는 그의 고통을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에 숙연함과 감사함을 동시에 느꼈다.

파리에서 돌아온 뒤, 한강의 시집을 펼쳐 들었다. 그 순간, 로스코의 붉은 세계와 다시금 맞닿았다. 시의 언어와 물감이 뒤섞이며, 나는 로스코의 붉은 영혼의 피를 수혈받고 있었다.

붓 대신 스펀지로 발라

영원히 번져가는 물감 속에서

고요히 붉은

영혼의 피 냄새

— 한강, 〈마크 로스코와 나 2〉 -


오래전, 독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에 다녀온 적이 있다. 시골에 계셨던 아버지는 신문지에 돈을 둘둘 말아 던지듯 내밀었고, 나는 서운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마음으로 혼자 한국을 떠났다. 도르래가 달린 큰 여행 가방을 끌고 회색빛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내렸을 때의 생소함과 두려움은 아직도 생생하다. 가방 바퀴 소리가 커서 부끄러워 살살 걷던 그 순간은, 내 첫 해외여행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비루했던 출발이었지만, 그 첫걸음이 이후 수많은 ‘떠남’의 원동력이 되었다.


이번에는 ‘미술관 투어’를 목표로 여행을 떠났다. 함께한 친구들은 모두 파리를 한두 번 다녀온 적이 있어, 많은 것을 보기보다 파리의 일상을 천천히 음미하기로 했다. 아침이면 미술관으로 ‘출근’했고, 저녁에는 퇴근하듯 마트에서 장을 본 뒤 외곽의 작은 집으로 돌아왔다. 따뜻한 밥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탁에서는 그림과 그녀들의 이야기가 이어졌고, 우리는 파리의 긴 겨울밤을 그 집에서 그렇게 나누었다.

에펠탑 아래에서는 세계를 위한 ‘평화의 춤’을, 고흐가 잠시 머물렀던 오베르에서는 ‘감사의 춤’을 추며 뮤즈들과의 만남을 기원했다.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들은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예술가들의 삶과 열정을 온몸으로 느끼게 했다. 닳아 있던 감정은 서서히 회복되었고, 사랑은 또 다른 형태로 다가왔다.


모든 여행이 삶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어떻게 여행하느냐’는 분명한 질문이 되었다. 낯선 곳으로의 발걸음은 두렵지만, 좋아하는 것을 향해 나아간다면—이를테면 ‘그림을 보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삶은 새로운 형태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이 글은, 나이 들어 더 이상 무엇을 봐도 가슴이 뛰지 않을 때, 그리운 것들을 찾아 떠난 낯선 발걸음의 기록이다. 우리들의 여행 이야기가, 떠나기를 망설이는 당신의 등을 살짝 밀어주는 조용한 손길이 되기를 바란다.


#파리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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