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간의 자유, 존재의 의미, 그리고 삶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탐구한 작품이다.1964년 미하일 카코야니스 감독이 만든 영화 《조르바》는 이 정신을 시각적 언어로 재해석해낸다.
문학 속 조르바는 말과 사유의 인물이다.
하지만 영화 속 조르바는 몸짓과 리듬으로 삶을 말한다.
활자 속 철학은 배우 안소니 퀸의 연기와 해변의 춤을 통해 살아나며,
문학적 사유는 영화적 감각 속에서 더욱 직관적인 진실로 다가온다.
이처럼 문학이 던진 질문은, 영화라는 장르 안에서 또 다른 방식의 해답을 찾는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그리스 크레타 섬에 묻힌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에는 이 세 줄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이 언명은 짧지만, 그의 삶과 문학 전체를 압축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리스인 조르바』는 그 선언의 내막을, 이야기라는 형식 안에서 살아 움직이게 만든 작품이다.
조르바는 그 실천적 주체로 등장한다.
조르바는 문명과 이성의 질서를 벗어나, 본능과 육체의 삶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광산이라는 노동의 현장에서, 그는 산투리를 연주하고 해변에서 춤을 추며,
삶과 죽음, 사랑과 신에 대해 거침없이 말한다.
그러나 그의 말은 사유라기보다 행동이며, 이념보다 실존에 가깝다.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니체와 베르그송의 철학을 인간의 살과 피로 구현한다.
니체의 초인, 베르그송의 ‘생의 약동’은 조르바의 몸짓 속에 살아 있다.
그는 말보다 리듬을, 미래보다 지금을 믿는다.
소설 속 ‘나’는 책과 사상에 몰두한 지식인이며, 조르바는 그에게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한다.
지식의 삶이 아닌, 삶 그 자체로 살아가는 방식.
조르바는 조국, 종교, 윤리와 같은 제도적 질서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그는 내면에서 분출되는 생의 힘을 따라 살아간다.
그에게 인생은 반복되는 무의미가 아니라,
그 반복 속에서도 기꺼이 의미를 만들어가는 한 편의 춤이다.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을 피하지 않으며, 웃음으로 비극을 건너는 사람이다.
영화 《조르바》는 이러한 조르바의 철학을 스크린 위에 펼쳐 보인다.
흑백으로 찍힌 이 영화는 문학적 사유를 시청각적 리듬으로 바꾸어, 조르바의 생을 더욱 육화시킨다.
특히 안소니 퀸이 연기한 조르바는 그 자체로 자유의 형상이 된다.
그는 철학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눈빛, 어깨의 흔들림, 거친 손끝은 모든 철학을 대신한다.
영화의 백미는 마지막 장면, 조르바와 ‘나’(영화 속 이름은 바질)가 크레타 해변에서 추는 시르타키 춤이다.
광산 사업의 실패, 떠나간 사람들, 무너진 계획… 모든 것이 끝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춤을 춘다.
언어는 침묵하고, 몸이 말한다.
그 춤은 단순한 민속무가 아니다.
삶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유쾌하고 숭고한 응답이다.
조르바의 철학이 가장 집약된 순간이며, 절망을 건너는 유일한 방식이 된다.
그것은 바로 ‘리듬에 몸을 맡기는 일’. 다시 말해, 삶을 껴안는 행위다.
『그리스인 조르바』 후반부에서 ‘나’는 말한다.
“행복이란 의무를 행하는 것.”
그 의무는 누군가의 명령이 아니라,
자기 내면이 요구하는 삶의 책임이다.
조르바는 여성, 자연, 음악, 노동을 통해 그 의무를 배운다.
‘나’는 책과 사유를 통해 자유를 찾으려 한다.
각자의 방식은 다르지만, 결국 두 사람은 모두 해방을 향해 나아간다.
조르바는 말한다.
“원하는 것이 있다면 구역질 날 때까지 삼켜보라.
그래도 싫다면 그때 토해내도 늦지 않다.”
삶은 이론이 아니라 경험이다.
그는 끝까지 실천자이며, 체험을 통해 진실에 다가간다.
책 속의 또 다른 인용은 그 생의 방식 전체를 압축해 보여준다.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모든 야망을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고…
사람들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나 사람을 사랑하며,
진탕 먹고 마신 성탄절 밤, 모두가 잠든 뒤
홀로 별을 머리에 이고,
왼편엔 육지를, 오른편엔 바다를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다 문득,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 장면은 조르바에게 있어 행복의 본질이자, 기적의 조건이다.
그는 그것을 쫓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를 정직하게 살아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삶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깨달음’이 온다.
그것은 의도할 수 없는 완성이다.
조르바는 계획하지 않는다.
대신 순간을 선택하고, 삶에 다가가며, 매번 새롭게 반응한다.
그는 삶을 해석하려 하지 않고, 삶 그 자체가 되기를 택한다.
“그래요. 조르바. 당신 덕택이에요.
나도 당신 방법을 채용해 볼까 합니다.
당신은 버찌를 잔뜩 먹어 버찌를 정복했으니
나는 책으로 책을 정복할 참이에요.
종이를 잔뜩 먹으면 언젠가는 구역질이 날 테지요.
구역질이 나면 확 토해 버리고 영원히 손 끊는 거지요.” (p.426)
삶이 크고 두려울수록, 우리는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되뇐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누군가에게 자유는 하나의 이상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겐 매일을 살아내는 작은 실천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조르바는 말 대신 웃었고, 계획 대신 춤추었으며,
사랑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살아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실패도, 상실도 아닌—
춤추지 못한 채 흘려보낸 삶이 아닐까.
� 참고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 열음사
Zorba the Greek (19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