늪과 자유의 시학
영화를 선택할 때, 우리는 종종 감독의 이름도, 배우도, 줄거리조차도 모른다. 그럴 땐 제목과 포스터가 하나의 운명처럼 다가온다. 사진 한 장, 색채 하나, 구도에서 오는 울림. 마치 낡은 시집의 문장처럼 그 감정의 단서들이 가슴을 흔든다.
이번에 만난 영화 〈엘 마르〉도 그랬다. 콜롬비아 영화라는 사실, 감독의 이름도 생소했지만, 화면 속 색채와 여백은 그 자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바다와 육지 사이, 한 청년의 침묵
〈엘 마르〉는 콜롬비아 출신 감독 마놀로 크루즈의 자전적 작품이다. 그는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아 알베르토라는 이름의 청년을 연기한다.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되며 그 예술성과 메시지를 세계 무대에 선보였다.
영화는 마약이나 폭력이 아니라, 그 모든 폭력보다 더 은밀하고 오래가는 빈곤과 질병을 말한다. 알베르토는 어린 시절 불치의 근육 수축 병을 진단받고 물 위에 지어진 작은 집에서 살아간다. 엄마 로사와 단둘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수 없는 알베르토는 목에 의료기기를 부착하고 손바닥만 한 거울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의 세계는 작고, 조용하며, 고립돼 있다. 하지만 거울을 통해 그는 자신의 세계를 구성한다. 수면에 비친 하늘, 엄마의 얼굴, 여자 친구의 미소. 거울은 그에게 창이자, 바다다.
사랑이 두려운 엄마, 사랑하고 싶은 아들
엄마 로사는 가난한 어부다. 매일 생계를 위해 물고기를 잡고, 의료기기 대여비를 걱정하며 살아간다. 그럼에도 아들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쏟는다. 그러나 그 사랑은 어느 지점에서 벽이 된다.
아들 알베르토를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 지셀. 그녀는 그를 위해 시청에 민원을 넣고, 그의 외로움을 덜어주려 노력한다. 하지만 로사는 지셀을 거부한다. 사랑이 가져올 이별과 그 상처가 너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린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아들의 고통을 보고도 꾹 눌러 안는다.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서면 어깨를 떨구고, 침묵 속에서 우는 엄마의 모습은 이 영화의 가장 슬픈 장면 중 하나다.
늪에서 바다로, 바다에서 자유로
알베르토는 말한다.
“엄마, 바다 보고 싶어. 바다로 데려가 줘요.”
하지만 그들이 사는 곳은 바다가 아니다. 시에나가 그란데 데 산타 마르타. 바다와 육지 사이의 거대한 늪. 그곳은 콜롬비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여 사는 북부의 해안 지방이다. 바다처럼 보이지만, 바다가 아니다. 자유를 상징하지만, 갇혀 있는 곳이다. 알베르토는 육지를 지나야 진짜 바다에 닿을 수 있다.
영화의 원제는 “늪(Ciénaga)”이다. 이 늪은 곧 상징이다. 가난과 병, 체념과 순종의 덫. 그리고 그 안에서도 무언가를 갈망하는 이들의 고요한 저항. 알베르토에게 바다는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와 사랑의 은유다. 그가 도달하고자 하는 꿈의 종착지이자, 삶의 이유다.
아름다움이 눈물을 덜어주는 순간들
〈엘 마르〉는 불행을 말하지만, 그것을 쇼처럼 내세우지 않는다. 대신 정제된 화면, 환한 햇빛, 부드러운 파도의 움직임으로 아픔을 감싼다.
특히 알베르토가 거울로 바라보는 풍경, 병든 몸을 안고도 미소 짓는 얼굴, 지셀의 따스한 손길 등은 모두 찰나의 아름다움이다. 그것들이 관객의 눈물을 빼앗고도, 어느 순간 위로가 된다. 이 영화는 절망을 말하지만, 절망 속의 인간을 연민이나 동정이 아닌 존엄으로 바라본다.
자유의 끝, 혹은 시작
마침내, 알베르토는 바다로 향한다. 육지를 건너 늪을 지나, 그는 도달한다. 그 장면은 마치 한 편의 시 같다.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을 때, 우리는 묻는다.
그는 자유를 얻었을까? 바다는 그를 받아주었을까?
영화는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보여준 것은 분명하다. 육체는 갇힐 수 있어도, 갈망은 갇히지 않는다는 것. 바다를 꿈꾸는 이에게 늪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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