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나 나나 서로 못 참겠는 건 마찬가지
바르고 정갈한 김밥에 질렸다. 크림치즈를 넣은 괴랄한 김밥도 싫다. 예전 살던 동네 근처 재래시장에서는 속을 잔뜩 채운 김밥과 멸치국수를 시원하게 말아주는 김밥집이 있었다. 토요 수업을 마치고 나는 그 시장에 들러 속이 시원한 국수와 통통한 김밥을 포장해와서 식구들과 점심을 해결했다. 아이들도 그 김밥을 정말 좋아했다.
새로 이사 온 동네 3년 차에 그 통통한 시장 김밥이 먹고 싶었다. 내가 말아도 되지만 그 과정이 힘들고 지치니 누워서 스마트폰으로 '**동 김밥'을 검색하고 있자니 내가 딱 그린 그 통통한 김밥의 사진이 뜬다. 검색을 해보니 걸어서 25분 거리의 옆 동네 반찬집이다. 반찬도 저렴하고 맛있고 김밥은 필수로 다들 사가고 떡볶이도 맛있다고 하니 산책 겸해서 남편과 작은 아이와 길을 나섰다.
날이 따스하니 산책을 나온 아기들, 강아지들 구경하며 작은 아이 학교를 지나 목적지에 즐겁게 도착했다. 과연 동네 맛집답게 상가 앞 대로변엔 깜빡이를 켠 차들이 줄줄이 서있었고 우리 식구들은 좋아하는 반찬을 골라서 계산 줄에 섰다. 김밥과 떡볶이는 반찬과 함께 계산하면 옆에서 바로 말아 포장해주는 시스템이었는데 토요일 점심시간이라 줄이 제법 길었다. 다양한 반찬 구경을 하다 나는 가게 앞으로 나왔고 남편과 작은 아이가 줄을 섰다.
#1.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한가로운 오후의 상가 주변, 40대 중년 아줌마인 나의 시점)
가게 안이 답답해 줄을 서는 동안 밖으로 나와 sns를 들여다볼 생각이었다. 상가 앞 대로변에 승용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줄줄이 주차 중이었는데, 나도 퇴근길에 여기서 반찬을 사 오려면 어디에 잠시 차를 대야 하나 둘러보고 있다.
다들 인도에 바짝 차를 대고 있는데 유독 한 차가 주차할 곳을 못 찾았는지 2차선에 과감히 주차(?)를 했나 보다. 뒤에 오는 차들은 직진을 못하고 엉켜서 난리가 났고 다들 클렉션을 울린다.
어떻게 저렇게 차를 댔지? 유심히 살펴보는데 심지어 안에 운전자도 없다.
"과감하게 미친 사람이군!" (독백)
그때 가게 안에 있던 작은 아들이 나오며 뭔가를 말한다.
#2. (가게 문 앞으로 한정)
"엄마, 좀 전에 어떤 아줌마가 급하다고 뛰어 와서 먼저 계산해달라고 난리예요."
"어? 급해? emergency? 반찬가게에서 급할 일이 뭐가 있어? 애기 엄마인데 아기가 우니?"
"아뇨. 애기 엄마 아니에요. 이 번에 아빠 차례였는데.."
"아기가 울면 당연히 양보해주지만 왜 그러지? 우리도 지금 헝그리 이멀전시 아니니?"
"ㅋㅋㅋ 맞아요. 우리도 급한데..."
"아빠 차례에 껴들면 너네 아빠가 그런 건 또 못 참을 텐데.... 기대가 된다!"
"아이씨.... 소리 듣고 불편해서 바로 나왔어요."
"아이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했니?"
"아니요! 그 아줌마가 아이씨라고 했어요."
"..........."
#3. (반찬가게 안 긴 줄의 앞, 40대 까칠한 중년 남인 내 남편의 시점)
이 반찬가게는 김밥 포장 없이 반찬만 사가는 사람들은 줄을 서지 말고 바로 계산할 수 있다는 푯말이 붙어있다. 하지만 이 아줌마가 말 그대로 난입을 하기 전엔 전부 다 김밥과 반찬을 같이 사려는 사람들이라 다들 인내심을 갖고 조용히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급하게 뛰어들어와 반찬을 후다닥 집어 들고 그 긴 줄의 맨 앞으로 들어와 소리를 지른다.
"여기 반찬만 먼저 계산할 거니까 빨리 좀 해요!!"
반찬 가게 안에는 직원이 세명인데 한 명은 반찬을 포장 중이고 한 명은 김밥을 말고 한 명은 김밥을 포장 중이라 손이 늦었고 일단 바로 응대를 할 수 없었다. 조금은 기다려야 하는 상황.
"아닛, 나는 반찬만 사간다고! 밖에 차를 대놔서 급하다고!! 나부터 얼른 해달라고. 아이씨..."
끊임없이 말을 하고 쉬지 않고 짜증을 낸다.
묵묵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던 중년남은 아드레날린이 솟구침을 느낀다. 자신의 바로 옆에서 꽥꽥 거리는 아주머니에게 단호한 중저음으로 말한다.
"여기 다들 오래 기다린 사람들입니다. 급한 사정이 있겠지만 직원들이 바빠서 바로 응대를 못 하는 상황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왜 그렇게 소리를 지릅니까? 시끄럽습니다!"
다행히 아주머니는 바로 목소리를 줄인다. 그 아줌마는 '원칙대로' 반찬만 사가니 줄 안 서고 쏙 빠져나간다.
경우가 아주 바르다.
#4. (다시 가게 앞 대로변)
나와 작은 아이는 계산을 마치고 나올 남편을 기다리며 과연 그 아줌마가 이겼을까, 남편이 이겼을까를 궁금해하며 이야기를 나눈다.
"아빠가 이겼을까?"
"글쎄요, 그 아줌마 세던데..."
"근데, 저 차 좀 봐라? 주차를 누가 저렇게 하니? 저기 이동식 카메라에 좀 찍혔으면 좋겠다. "
"와, 미쳤네. 차를 어떻게 저렇게 대요?"
여전히 차량 흐름은 느리고 비상등을 켜고 간 차주인은 바로 나오지 않는 대담함에 나도 아이도 감탄한다.
그때 반찬가게 문이 열리고 60대 정도의 세련된 차림의 아주머니가 뛰어나오더니 2차선에 주차한 차량으로 점프! 레이서처럼 출발한다.
"억!!!!!! 엄마!!! 저 아줌마가 그 비상상황 아줌마예요!!"
"뭐? 정말 가지가지하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때 반찬가게 문이 다시 열리고 지친 남편이 양손 가득 음식을 포장해서 나온다.
가족 셋은 각자의 퍼즐을 내놓고 맞추기 시작한다.
작은 아이는 참 예민했다. 장소가 바뀌면 불안해서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기띠를 하고 코스트코 계산대 줄에서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 내 앞에 있는 아주머니가 순서를 양보해주셨다.
나는 정말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아주머니는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아기가 울면 응급상황이니 순서 양보가 당연한 거예요. 얼른 계산하고 아기 데리고 집에 가요~"
그 아주머니에게 정말 고마웠고 그 이후로 나도 아기가 우는 가족에게는 관대하게 양보하게 되었다. 말없이 구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노인분들이 내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시면 기꺼이 양보한다.
하지만 남들에게 배려를 강요하고 자신의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내어줄 내 인내심은 조금도 없다.
그 인내심은 애초에 그들의 몫이 아니다.
배려는 권리가 아니므로 조용하게 기다리면 배려를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 있다.
배려를 받고 싶으면 스스로 타인을 배려하면 된다.
아까 그 아주머니의 차는 재빨리 생활불편 신고 앱으로 사진 찍어 전송을 했어야 했다.
그 생각을 늦게 한 나 자신을 반성한다. 배려도 중요하지만 무례의 싹을 제거하는 것도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