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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쌤 Apr 09. 2022

그 노련한 협상의 기술

소녀는 그렇게 아줌마가 되어 갔다. 

어릴 때 엄마를 따라 시장에 가면 흥정하는 모습을 잘 보곤 했다. 상대방의 기분을 깎아내리지 않으며 유려한 말과 흐름으로 엄마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물건을 사는 것을 보며 때로는 감탄을 하기도 하고 가끔은 멀리 도망가기도 했다.


따져야 할 일이 있을 때 어쩔 줄 몰라서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엄마는 단호한 기세로 상대를 압박하곤 했는데, 그건 우리 엄마만의 필살기가 아니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에게서도 그런 모습을 보았기에 '도대체 아줌마들에겐 무슨 일이 일어났나?' 궁금하기까지 했다. 


조직 생활을 하며 여기저기 까이고 부딪히면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일이 조금씩 쌓이다 보니 나도 더 이상 야들야들하지 않게 되었다. 가만히 있으면 호구가 되는 세상에 적극적으로 나를 변호하고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많아졌다. 자영업을 결심하고 업장 공사를 하면서는 이 기세가 더욱 강력해졌는데 전기 공사하는 업체에서 견적대로 하지 않고 돈을 달라고 하질 않나, 관공서에서 공무원이 쓸데없이 떽떽거리질 않나 20대 어린 여자애는 그렇게 쌈닭이 되지 않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때 동업하던 나의 배꼽친구는 '아줌마들이 왜 드센지 알겠어. 조용히 말하면 우리말을 듣지를 않아. 악을 써야 겨우 들어주잖아!'라며 한숨을 쉬었는데 실제로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소녀에서 아줌마로 진화했다. 


나이가 들수록 큰 소리를 내지 않고 상대와 협상하는 기술을 알게 되었다. 큰소리를 내는 것은 하수다. 


초짜 오케스트라 지휘 선생일 때는 떠드는 아이는 일일이 호명하고 큰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러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 

경력이 쌓이면서 나는 아이들이 떠들면 제일 액션을 크게 하는 아이 한 명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주변의 아이들이 내 눈을 보면서 한 명씩 조용해지고 전파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길어야 2분이다. 나는 목을 쓰지 않고 그저 눈빛으로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다. 아이들은 나를 '기다려주는 선생님'이라고도 했지만 사실 그 방법이 내 에너지를 가장 적게 쓰는 방법이었다. 




커트 머리를 고수한 지 9년 차인데 이사 온 동네에서 미용실을 찾지 못해 방황 중이었다. 그나마 지난번에 한 번 방문한 곳의 디자이너의 실력이 맘에 들었는데 그때는 헤어 제품을 권유해서 좀 부담스러웠다. 구관이 명관이라 다시 가 보았는데 꽤 마음에 들게 잘라준다. 아침 드라마 탤런트 같이 잘 생긴 헤어 디자이너는 내 모질과 두상, 제비초리까지 고려한 손질법을 상세히 알려주고 친절하게 응대한다. 

여성스러운 목소리와 몸짓으로 시종일관 상냥하게 대화 주제를 바꿔가며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내 말에 리액션을 잘하니 이 정도면 대화의 달인급이다. 

뒷모습이 예쁘게 나왔다며 정성스레 사진을 찍어주더니 "고객님, 아이폰이시죠? 에어드롭으로 사진 보낼게요~"하며 사진까지 바로 전송! 하나의 공연을 보는 느낌이었다. 

마지막 손질이 끝나고 계산이 남았다. 나도 정착을 하려면 선불권을 구입하여 할인을 받는 것이 이득이다. 지난번엔 아주 조건이 좋았는데 오늘은 손님이 많아서인지 디자이너 샘은 지난번과 같은 조건은 꺼내지 않는다. 

'그래, 오늘은 이 정도는 당해 주자!' 싶어 지난번과 같은 할인율에 금액은 좀 더 크게 선불권을 구매하기로 협상 타결!


기분 좋게 결제하려는 순간, 뭔가 불안한 느낌이 스친다.  

"혹시 이 선불권에 유효기간이 있나요?"

"네, 고객님. 오늘부터 1년 안에 사용하셔야 합니다~"

"어머, 저는 커트만 해서 한 달에 한 번 오니 다 사용을 못 해요. 그럼 못 하는데...."

"어어.... 그럼 그 아래 금액대 선불권으로 하시겠어요?"

"그럼 할인율이 달라져서.... 아....."

"........."

"........."


"그럼 파격적으로 소액권에 같은 할인율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안 되는 것이 어딨어. 내가 일찍이 백화점에서도 네고의 달인이었는데.'

 그렇게 유리하게 협상을 이끌어 냈고, 앞으로는 커트만 할 거라고 못을 박았다. 한 달에 한 번 남자처럼 꼭 이발을 해야 하는 여성 숏컷은 사실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 미용실에 갈 때마다 케어나 옵션을 추가했다가는 파산을 할 지경이니 커트만 고집할 수밖에 없다. 


기분 좋게 인사를 나누고 미용실을 나서면서 협상을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나만이 아닐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머리는 가볍고 햇살은 따스하고 벚꽃은 만개했고 집으로 가는 길에 딸기 세 팩을 9,900원에 샀으니 봄은 바야흐로 아줌마의 계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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