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쌤 Apr 22. 2022

서운하다는 그 말

시절의 짧음을 한탄할 때 말고는 삼켜야 할 말

"왜 내 편 안 들어줘요? 정말 서운해요."

"내가 학교 후밴데 왜 나는 안 챙겨줘요? 서운해요."


직장을 다니며 직장 동료에게 직접 들은 말이다. 자신의 감정을 조절 못 해 싸움이 났는데 왜 편을 안 들어주냐고 서운하다신다. 내가 왜? 내 가족도 아니고 다 같이 일하는 동료인데 편들어 줄 일이 어디에 있나. 


서운하다는 그 말, 뱉는 순간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마음을 이상하게 요동치게 한다. 

듣는 이를 준엄하게 꾸짖는 그 말, 듣는 이를 반성하고 돌아보게 하는 그 말. 


서운함은 그 감정을 느낀 사람을 돌아보게 하기보단 듣는 이를 괴롭히는 말이다.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저 사람이 더 서운하려나? 이렇게 하면 덜 서운하려나?'

그 말을 들은 후부턴 내 모든 행동에 제약이 걸린다. 

서운하다는 감정은 본인에게 원인을 물을 일임에도, 그 말을 전달받은 타인에게 짐을 지운다. 

그럼 나는 서운한 적이 없었나? 왜 없겠나, 인생이 서운한 일 투성이지.


아이들 같이 키우며 오랜 시간 같이 한 모임이 있었다. 서로 안부를 묻고 여행을 다녀오면 선물을 나누고 이사 가면 아쉬워하고 늦둥이 낳으면 선물을 하고 사업을 하면 개업 축하금을 나누던 모임이었다. 서로 물리적으로 조금씩 거리가 생기면서 소식도 뜸해졌고 나도 내 소식을 부러 알리지 않았다. 그중에 한 가족이 머나먼 타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다들 너무 아쉬워하면서 환송회를 기약했다. 나도 기꺼이 아이들 데리고 참석하려고 했는데 운전해서 가는 동안 일터에서 발생한 확진자 소식을 듣고 차를 돌려 보건소로 향했다. 

이민을 가는 친구에게는 다들 조금씩 돈을 걷어 밥이라도 사 먹으라 여비를 보탰다. 나도 기쁜 마음으로 참여했다. 비록 환송회에 가지 못 해 얼굴을 보지 못해도 그리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그 간 책도 내고 사업도 시작했는데 말로만 축하를 받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운한 마음이 일었다. 속물근성이 들끓었다. 

나도 내 마음 상태에 놀랐지만 표현하지 않고 생각을 했다. 내 소식을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으니 그럴 수 있고 그 모임에서 내 소식을 들었어도 내가 그 정도의 중요도를 가졌다면 사실 내가 서운할 일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서운하다는 말을 표현하는 순간, 상대의 변화를 요구하게 된다. 내가 서운한 것은 당신의 탓이므로 당신이 좀 더 적극적으로 나를 사랑하라는 강요다. 그렇게 억지로 얻어낸 애정은 과연 진실한가.  


남이 나 같지 않음으로 인한 서운함은 나의 감정이니 타인에게 행동의 수정을 강요할 일이 아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뱉지 말아야 할 말이다.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서운하다고 느낄 수는 있지만 그걸 표현하는 순간 고스란히 듣는 이의 부담으로 남는다. 부모의 사랑은 내리사랑이니 다시 돌려받을 것이 없고 뭐라도 돌아온다면 감사할 일이지, 안 돌아온다고 서운할 일이 아니다. 


연인이나 부부 지간에는 서운함이 있을 수 있고 그 관계는 서로 남이 아니므로 서로 이해하고 노력해야 한다. 


타인에게 친구에게 동료에게 후배에게 직장 상사에게 우리는 서운함을 얘기할 필요가 없다. 그 말을 뱉는 순간 그 관계는 다시 돌이킬 수 없다. 본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서운함을 표시하고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마음에 부담을 준 관계는 결코 회복될 수 없다. 


'아기가 너무 빨리 자라서 서운해요.'

'봄이 짧아서 벚꽃이 빨리 져서 서운해요.' 


아쉬운 시간과 아름다운 시절의 짧음을 한탄하며 그 서운함만을 이야기해도 인생은 짧다. 부디 인생의 아름다운 찰나만을 서운해하자. 




작가의 이전글 아줌마 유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