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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쌤 Jun 14. 2022

힘을 빼는 것, 그것이 음악이다.

인생도 그러하다.

놀라운 속주, 강렬한 피아노 터치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거기에 더해 화려한 퍼포먼스로 무장한 신인이 나타나면 스포트라이트는 그곳으로만 쏠린다.

긴 동영상보다는 짧은 릴스가 각광받는 시대이니 더욱 그렇지만 속주와 강렬한 연주는 인터넷이 없던 시절에도 주목받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빠른 연주는 보는 사람들에게 경이로울 수밖에 없다.


2022년 6월 12일, 예술의 전당에서 천재 피아니스트 얀 리시에츠키를 만났다. 프로그램이 상당히 독특했는데 쇼팽의 에튀드 Op.10의 12곡 전곡과 녹턴 11곡을 번갈아 연주하는 '밤의 시'라는 리사이틀이었다.


피아노 좀 쳐 본 사람이라면 한 번씩 연주해 본 쇼팽의 에튀드는 빠른 속도의 연주도 중요하지만 대비되는 선율을 잘 살려야 하는 까다로운 곡으로 예중, 예고, 대학 입시의 단골 시험 곡으로 쓰인다.

이 에튀드를 낭만적인 녹턴과 함께 연주한다니 기대가 되었다.



190cm가 훌쩍 넘어 보이는 큰 키와 큰 손, 긴 팔은 피아노를 연주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으로 보였는데 역시나 첫 곡인 에튀드의 왼손 옥타브는 굉장히 강렬하면서도 힘 조절을 잘하여 주제를 잘 들리게 했다. 사실 저 신체조건으로 심장까지 울리는 타건을 하지 못 한다면 그것도 어색할 일이다.

에튀드는 그렇게 관객에게 각인되었다. 깊은 터치는 강렬한 소리를 가져왔지만 요란하지 않았다. 그의 에튀드는 참 점잖았다. 긴장되는 에튀드와 릴랙스 되는 기분의 녹턴을 번갈아 연주하는 것은 굉장한 아이디어였다. 연주자의 요청으로 박수를 칠 수 없어 더 집중할 수 있었다.


*쇼팽 에튀드 전곡 연주

https://youtu.be/qDbC-kpu1l4


얀 리시에츠키의 연주를 몰입하게 만든 것은 개인적으로 녹턴이었다. 그는 녹턴에서 완전히 힘을 뺀 유연한 터치로 연주했다. 모든 악기는 피아니시모를 연주할 때 가장 어렵다. 작은 소리로 표현을 정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호흡과 근육을 완전히 통제하며 몸의 힘을 빼고 또 빼야 하는 것이다. 그는 트릴과 아르페지오를 여리고 보드라운 어린 새처럼 작지만 탄력 있는 소리로 연주했다.


20대 청년의 감성이 놀라웠다. 1부의 마지막 곡인 녹턴은 정말 맘에 쏙 들어왔다.

https://youtu.be/sX4951rIkDY



2부의 마지막 녹턴인 C sharp minor, Op. Posth. 의 재현부의 주제에서 표현한 피아니시시모(매우 매우 여리게)는 작지만 선명했고 따스했다. 그의 아르페지오를 듣는데 생전 가보지 못 한 라벤더 밭에서 훈훈한 미풍과 꽃향기를 맡는 기분을 느꼈다.  (바쁜 분들은 2분 40초부터 3분 50초까지 들어보세요)


https://youtu.be/XOWJP40MrkU

개인적으로도 참 좋아해서 즐겨 연습하는 곡인데 얀의 해석에 가슴이 뭉클했다. 조성진의 해석도 좋았지만 이 곡은 얀의 해석이 더욱 좋다. 같은 곡이 이렇게나 다르게 들리다니 연주가 끝나고도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악기를 연주할 때 몸이 잔뜩 긴장해서 어깨가 올라가 있는 학생들을 만난다. 시작 전에도 연주 중간에도 이야기해준다.

"어깨에 힘을 빼고 허리는 반듯하게 하세요."


그러면 학생들은 놀랍게도 힘을 빼는데 어깨가 편안하게 내려가면서 본인이 온몸에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포르티시모(매우 세게)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 크고 강한 소리일수록 몸, 특히 손목과 팔의 힘을 빼고 몸 전체의 무게로 연주해야 맑고 깊은 강한 소리가 난다.

악기를 연주하며 인생을 생각한다.

포르티시모로 주장하고 싶을 때에는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시고 몸의 힘을 빼야 남들을 설득할 수 있다. 피아니시모로 내가 원하는 목소리를 내어 남을 설득시키기는 참 어렵지만 그렇게 살고 싶다.

몸도 생각도 힘을 빼자. 그것만이 나를 구원한다.



2009년 하마마쓰 아카데미 피아노 콩쿠르에서 조성진과 얀 리시에츠키. 너무나 귀엽다. 이 대회에서 조성진은 1위, 얀은 3위를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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