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쌤 Jun 26. 2019

인생의 절반쯤, 그 언저리에서

매실주 담그다 생각하는 뜬금없는 인생 이야기

보름 전부터, 마트나 시장에 가면 보이는 통통한 매실을 눈여겨보았다. 아이들이 어려서 청량음료를 안 먹이고 매실청을 얼음물에 타 주었는데, 봄부터 가을까지 어찌나 잘 마시는지 해마다 매실청을 담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각종 청량음료에 맛을 들이니 매실청은 시들해졌고, 나도 미리 매실을 예약하고 준비하는 일을 자연스레 그만두게 되었다.


올 초에 집에 손님을 초대하면서 제법 취기가 오르면서 이야기가 깊어지고 즐거워지는데, 마시던 술이 똑 떨어졌다. 그때 베란다 싱크대에 있는 오래 묵은 매실주가 생각났다.


이 매실주는 내가 27세, 갓 결혼한 새댁 시절 담근 매실주인데 당시 어찌나 많이 담갔는지 아직도 한 병이 남아 있었다. 얼음을 동동 띄워 와인 디켄터에 담았다. 매실향이 숙성되어 온전히 그 향을 술 안에 가두었다, 술이 공기와 만나 술잔으로 떨어지며 그 향이 거실 안을 가득 채운다. 한 모금 입에 머금으니 오래 묵힌 술답게 신맛은 둥글게 부드럽고 단맛은 깊고, 매실향은 호흡으로 순환된다.


캬~ 명주로구나.

마지막 남은 술 한 병을 비우고, 기분 좋게 파했다.


이제 매실주가 사라지고, 시장에 매실이 보이기 시작하니 맘이 복잡해진다. 저걸 사서 다시 새 술을 담가야 하나, 예전에 담근 술도 이제 겨우 먹었는데 뭘 또 담그나, 갈등이 시작된다.


재래시장 채소 가게에 갔더니 특 사이즈 매실이 향을 내며 나를 유혹하는데 또 맘이 흔들린다. 그래도 건강이 중요하니 올해는 술 좀 줄이고 집에 여러 가지 늘어놓지 말아야겠다, 결심을 하고 맘을 접었다.


엊그제 저녁을 지으며 팟캐스트를 듣고 있는데, 평소 좋아하는 선배님으로부터 톡이 왔다.

매실 한 박스 가져갈래? 하며 사진을 보내주셨는데, 이제까지 구경한 매실 중에 가장 탐나는 사이즈와 신선도!


아아아아.. 저 술 끊... 아니 줄여야 하는데.

'선배님, 이걸로 매실주 하세요~' 하니, '우리 남편 술 끊어야하는데..' 하신다.

선배님 남편분에게 보여드렸더니, 관심이 없으시단다. 세월을 기다려야 하는 술이라 그런 거 같으시다고. (감사합니다)


어제 아침에 눈 뜨자마자 운동 다녀와서 마트로 직행, 소주 30도짜리 3.6리터 다섯 병과 담금주용 큰 병을 샀다. 다시 집으로 돌아와 대형 스텐 볼 2개를 깨끗이 씻고, 담금주용 병도 정성스레 씻어 뒤집어 말린 후, 선배님을 만나러 일산의 멋진 까페로 갔다.


우아하게 커피 마시고 큰 창으로 숲을 바라보며 밀린 수다를 떨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순간, 식모 모드 전환. 매실 10킬로 박스가 생각보다 굉장히 컸다. 그걸 받아 들고 차에 싣고 집으로 오는데 차 안이 온통 매실향으로 가득하다.


까페 수다용 원피스를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매실 박스를 들고 베란다로 옮긴 후, 플라스틱 의자에 쪼그려 앉아 차가운 물에 매실을 씻는다. 기온이 30도가 넘어 무더운데 차가운 물로 향기로운 매실을 씻으니 기분이 좋다.

생각보다 많은 매실 양에 놀라 소주를 더 사 와야겠다고 생각하며 보드라운 매실 속살 안 다치게 꼭지를 조심스레 딴다. 이미 발과 다리, 팔은 온통 물에 젖었지만 아이처럼 즐겁다.


집에 있는 채반을  총출동시켜 물기를 뺀다.

사진의 양보다 2배는 더 많이 있다.


그동안 잠시 쉬었다, 다시 작업 시작. 물기 빠진 매실은 마른 천으로 완전히 물기를 닦아 소주에 담근다. 이번에는 설탕을 안 넣고 소주만 부으니 작업이 쉽다. 다만 양이 많고 무거워 허리가 아플 뿐.

 

소주를 붓다가 바닥에 흘리기도 하고, 매실을 넣다가 얼굴에 튀기도 하면서 얼추 일을 마무리한다.

완성된 작품을 보니 뿌듯하다.

이 중에 한 병은 선배님 댁에 놔드려야겠다


27세에 담고  43세에 두번째로 담고 환갑 즈음해서 한 번 더 담그면 인생의 마지막 담금주가 될 거 같다. 장수가 축복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내가 이런 생각에 미치자 인생이 참 짧다고 느껴졌다.


매실주 담그다 말고 서글프다.

첫 매실주를 걸러 남편 친구 집들이할 때, 내 친구 부부들 동반 모임 할 때, 남편 출장 가면 동네 엄마들 집으로 불러 수다 떨  때.. 오랫동안 즐거운 시간을 같이 했다.


이제 인생 3막쯤 시작하는 듯하다. 인생의 쓴 맛도, 단 맛도 대충 아는 나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나이.

이 술과 함께 할 친구와 시간이 궁금해진다. 10년쯤 지나면 아이들도 한 잔씩 같이 할 테지.


환갑이 되면 며느리도 있으려나, 같이 담자고 하면 싫어하겠지. 나 혼자 담가 친구 하고나 주야장천 마셔야겠다.


빨리 내년이 오면 좋겠다. 내년에 베란다에서 술통을 개봉하면 또 행복해질 테지.  











이전 14화 이야기가 있는 주방 14. 뱅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