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한 번 쳐보려고 몰래 연주장에 잠입했던 소녀 이야기
1993년 겨울, 고3이었던 나는 대학입시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내가 지망하는 대학의 피아노 실기 곡은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8번 1악장으로 결정되어 이미 닳도록 외우고 연습 중이었다. 의외로 평이한 곡이었지만 도입부의 리듬이 사람마다 해석도 다르고, 앞이 느리고 뒷부분은 빠르니 이걸 테크닉적으로, 음악적으로 어떻게 보여줘야 하나 고민이 많이 되는 곡이었다.
전에 언급한 악기별 가격에 대한 글(https://brunch.co.kr/@frogsoo94/31)에서 한 번 언급했지만, 피아노 연주자는 자신의 악기로 연주할 수 없기 때문에 항상 고민이다. 연주자는 연주 전에 리허설을 통해 적응할 수 있지만, 입시는 다르다. 긴장되는 시험 순서를 먼저 추첨하고 오랜 시간 기다리며 온열팩과 손수건으로 온도를 조절하고 땀을 닦고 입실하여 피아노 앞에 앉아 초면인 피아노와 그제야 대면을 하게 된다.
'안녕? 잘 부탁해. 건반이 무겁지 않길, 너무 가볍지도 않길 바라. 건반의 깊이가 낮아 날 당황시키지도, 너무 깊어서 터치가 서걱거리게도 하지 않길 바라. 나 좀 잘 부탁해. 입학해서 다시 널 만나길 바라.'
자다가도 꾸는 꿈이었다. 어떤 피아노를 만나던지 어떤 악조건의 피아노를 만나던지 당황하지 않고 칠 수 있게 학교 강당에 있는 피아노, 아는 교회마다 있는 피아노, 학교 구석에 버려진 피아노도 열심히 쳤다.
입시가 코 앞에 닥친 어느 날, 피아노 선생님께서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을 해주셨다. 이번 피아노 실기시험은 음대 관현악실이 아니라 백주년기념관에서 본다는 이야기였다.
백주년기념관은 연주회 보러 많이 다녔고, 선생님들 뵈러 대기실도 들락거리던 곳이라 구조를 훤히 알고 있었다. 관객 출입문은 당연히 잠겨 있을 테고, 지하 대기실을 통하면 무대 위로 들어가 피아노를 쳐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엄마와 같이 백주년기념관에 들어갔다. 로비에는 관리하시는 분 한 분이 앉아계셨는데, 낮이라 연주도 없고 리허설도 없는 날이었는데도 무슨 일로 왔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 당당하게 우리 집에 온 것처럼 엄마를 끌고 지하로 내려갔다.
지하실은 조명 하나 없이 컴컴했고 나는 벽을 짚어가며 무대로 향했다. 엄마는 이러다가 걸리면 어떡하냐며 그만 가자고 말리셨고, 나는 피아노 한 번만 쳐볼 건데 걸릴게 뭐가 있냐며 말릴 거면 따라오지 말라고 엄마 손을 놓았다. (후에 엄마는 내가 저런 걸 낳았구나.. 놀라셨다고)
더듬더듬 잡동사니가 쌓여있는 무대 옆까지 다가가 드디어 무대의 문을 열었다. 시커먼 형체의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가 보인다. 너무 아름다웠다. 의자를 천천히 빼고 뚜껑을 열었다. (다행히 피아노를 잠가놓지 않았다)
숨이 가빠온다. 손이 덜덜 떨린다. 침착하자. 어떻게 들어온 무대인데, 한 번만 침착하게 치고 집에 가자.
진정이 되자 힘차게 c minor 코드를 눌렀다. 내가 한 해석대로 끈적끈적하고 묵직하게 32분 음표까지 정확하게, 느리고 장엄한 Grave의 5마디 정도를 쳤을까?
갑자기 무대 위에 스포트라이트가 켜졌다. 관리하시는 분이 뭐 하는 거냐고 소리치며 달려온다.
이 상황이 전혀 무섭지 않았다. 차분히 말씀드렸다.
이 학교 음대 실기시험 볼 학생인데, 이 곳에서 피아노 시험을 친다는 얘기를 듣고 한 번만 쳐보려고 들어왔다고. 잘못된 행동이지만 양해해 주시면 한 번만 치고 가겠다고.
관리하시는 분이 껄껄 웃으시며, 당신도 음대 성악과 학생인데 아르바이트로 이 곳을 관리하고 있다면서 화도 내지 않고 두 번 쳐보고 가라고 하셨다. 합격하면 꼭 알려달라고 당부도 하셨다.
조명을 받고 큰 무대 위에서 무려 두 번을 연주하고 내려왔다. 극한의 스트레스 상황에서 연주를 해 보았으니 큰 도움이 된 것이 분명했다.
그 해 실기시험은 항상 하던 음대에서 치러졌다. 건반이 무거운 데다 깊이가 얕아 당황스러웠으나 피아노는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그래도 앞선 경험으로 Grave 마지막 부분의 또르르 굴러내려 오는 부분에서 실수를 했으나, 심사위원들을 보고 한 번 씩~ 웃고 다시치는 대담함이 생겼다.
*베토벤 피아노 소타나 8번 전악장
무대에 오르기 전 아이들은 내게 묻는다. 선생님은 안 떨려요?
응, 나는 안 떨려.
*입시 준비의 긴장을 풀어주고 나를 위로해준 2악장. 조성진의 표정으로 그 절절함을 느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