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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Nov 06. 2023

듣는 법을 잊은 당신에게






 프러시안 블루의 몸체에 꼬리를 한껏 하늘로 세운 압생트를 섞은 노란 눈의 고양이가 세로로 긴 홍채로 나를 바라본다. 3분의 2. 경계 사이 내민 몸은 호기심일지, 경계심일지 가늠하기 힘들어 바라보는 나의 고개도 갸웃 눕혀진다.

 말을 건네는 듯한 눈빛,
"들을 준비, 됐어? 그럼 이리 와 봐."






 김혜진의 장편소설 <경청>이 내게 말을 건넨다. 그저 들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녀는 환하고 넓은 길과 어둡고 좁은 길 사이 위치한 자신의 집을 돌아본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상반된 두 세계의 경계가 된 집. 그녀는 정처 없이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 걷는다. 그러면서 어떤 기억을, 어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상기한다. 떨쳐 내려고 할수록 생각은 끈질기게 달라붙고, 그녀는 이런 식으로 과오를 깨우치게 하는 시간의 무자비함을 실감하는 중이다."
                     - p.35 <경청> 민음사








 상담사로 명성을 얻고 있던 이해수, 거듭된 방송출연과 자신의 일로 지쳐가던 때 패널로 참여한 방송에서 한 배우의 행동을 보고 그에 대한 평가를 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원고 속 등장한 남자의 여러 가지 문제행동을 분석하고 그에 대해 진단을 내리고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는 자살을 한다. 그때부터 시작된 네티즌들의 험담으로 세상 밖으로 밀려난 그녀가 자신의 바운더리를 살피고 있는 모습이다.


 그녀는 매일 사람들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주현, 상담센터의 장, 자신의 징계를 앞둔 시점 열린 회의 참석자들, 그리고 이혼하게 된 남편 태주에게 쓰는 수없이 많은 편지들은 그녀의 손끝에서 탄생하지만 부치는 편지는 단 한 통도 없다. 그저 쓰고, 또 쓰고. 매일 새롭게 적어가는 문장들은 그대로 서랍 속으로 사라진다. 수취인 분명의 미완성 편지들이 쌓여갈수록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수없이 많은 복기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항상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마주하게 되는 자신과 자신. 둘의 대면 속에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아보지만 보이지 않는 출구로 지쳐가던 날, 세이와 미루맘을 통해 동네 길고양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다.



 그중에서도 여러 가지 상처들로 강제로 잡기라도 해서 치료를 받게 해야 할 고양이 순무를 만나게 되는데 삶의 목표를 잃어버린 그녀에게 순무의 포획은 여름날의 무더위도 이겨내며 참고 기다려야 할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드는 걸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이렇게 날 조롱하는 데 혈안이 된 이유는 뭘까. 태도의 문제, 말투의 문제, 예의의 문제, 인격의 문제, 신뢰의 문제, 직업윤리의 문제. 나에게서 수많은 문제들을 예리하게 찾아낸 사람들이 보여 주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 p. 63 <경청>










 자신이 처한 상황의 불합리성에 토로하던 그녀의 마음은 순무를 구출하기 위해 제일 먼저 경계심 많은 길고양이에게 다가서는 법, 인내심을 배우기 시작하며 조금씩 가라앉는다. 고양이들이 좋아한다는 간식 츄르를 아무 거리낌 없이 받아먹으며 사람의 손길을 즐기는 까미와 달리 상처투성이에 곧 죽을 듯 힘든 상처를 갖고도 쉽사리 마음 문을 열지 않는 순무. 그녀에게 순무를 기다리는 은행나무 공터는 "예배당"이 되어버렸고 순무를 기다리는 시간을 통해 고요와 평화를 되찾게 된다.







뭐든 쌓는 건 어렵고 허물어뜨리는 건 쉽다. 삶이 신중하게 블록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면 단 하나의 블록을 빼는 것만으로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교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이처럼 도처에, 발에 걷어차일 정도로 흔하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 p.157 <경청>










 순무를 잡기 위해 통발을 들고 사투를 벌이다 심한 상처를 입고 치료차 간 병원에서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단죄를 당하듯 내몰린 뒤 그녀는 자신을 악의적으로 비방하는 댓글을 쓴 댓글러들을 고소하는 일을 포기한다. 그리고 온전히 자신의 삶, 하루의 일과 속 만나게 되는 존재들에 집중하게 된다. 초등학교 6학년 길고양이 돌보기 친구 세이가 처한 학교폭력과 가정사로 인한 고민에 섣불리 끼어들지 않고, 아이가 자신의 맘 속 이야기를 먼저 꺼내주길 기다리기 위해 노력한다. 먼저 섣부른 진단이나 질문을 하지 않고 바라보는 일. 상대가 먼저 말을 하기를 기다리는 법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게 큰 의미가 되어 준 순무. 한없이 미약한 작은 생명이 주는 의미로 서서히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한 그녀.











 그녀는 순무가 그저 동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잠깐씩 잊는다. 아니, 사람들이 동물이라고 말할 때, 짐승이라고 부를 때, 그 단어 속에 담긴 의미가 얄팍하고 한정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언어가 생략된 순무와의 교감이 그녀에게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수없이 많은 말들로 소란스럽던 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헤아림과 공감, 위로와 포용.
그런 것들은 이처럼 완전한 침묵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일까.

 말에 관해서라면 그녀는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말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해석하고, 설명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고백하면서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그저 넘쳐 나는 말들에 둘러싸여, 불필요한 말들을 함부로 낭비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한 말이 언제 탄생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 p. 225 <경청>











 자신이 한 말로 인해 힘들게 쌓아 온 모든 일상이 무너지고 와해되는 중이었다. 그녀의 분노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이들을 향해 편지를 쓰며 항변하는 것으로 이어졌지만, 주변의 존재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며 자신이 했던 행동을 객관화시키며 바라볼 수 있는 적당한 거리감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해 자신이 만든 의도치 않은 말의 결과물에 대해 깊은 속죄를 할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된다.


 소설 경청은 우리가 잊어버린 듣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마다의 이야기들과 서사를 꺼내기 급급한 시대를 살고 있다. 쏟아지는 이야기와 이미지들 사이 올린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귀 기울이기보다는 눈에 담긴 이미지를 단기기억 저 멀리 소화하며 끊임없는 자극을 원하는 우리들의 일상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든다.


 소비되는 말들의 원천이 어디인지 확인해 보지도 않고 전달하며 퍼뜨리는 전달자로 살아가는 의식 없는 사람은 아닌지, 그리고 무가치하게 소비되는 말들을 포장하기 위해 급급한 사람은 아닌지, 확인되지 않은 사실들로 사건의 주체가 되는 이들을 매일 단죄하며 나는 그들과 다르다는 안도감으로 하루를 살아갈 양식을 얻는 이는 아닌지에 대해 계속 반문하게 만드는 진심으로 아름다운 소설을 만났다.










* 같이 들으실래요?

라흐마니노프 교향곡 2번
(KBS교향악단 연주)

https://youtu.be/9XcBXUVszUQ?si=B2czfdwT0qSBC0H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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