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환하고 넓은 길과 어둡고 좁은 길 사이 위치한 자신의 집을 돌아본다.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지 못한 상태로 상반된 두 세계의 경계가 된 집. 그녀는 정처 없이 떠오르는 기억을 따라 걷는다. 그러면서 어떤 기억을, 어떤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지난날의 자신을 상기한다. 떨쳐 내려고 할수록 생각은 끈질기게 달라붙고, 그녀는 이런 식으로 과오를 깨우치게 하는 시간의 무자비함을 실감하는 중이다."
- p.35 <경청> 민음사
도대체 누가 이런 걸 만드는 걸까.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으면서 이렇게 날 조롱하는 데 혈안이 된 이유는 뭘까. 태도의 문제, 말투의 문제, 예의의 문제, 인격의 문제, 신뢰의 문제, 직업윤리의 문제. 나에게서 수많은 문제들을 예리하게 찾아낸 사람들이 보여 주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 p. 63 <경청>
뭐든 쌓는 건 어렵고 허물어뜨리는 건 쉽다. 삶이 신중하게 블록을 쌓아 올리는 것과 같다면 단 하나의 블록을 빼는 것만으로도 전체가 무너질 수 있다는 걸 그녀는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교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이처럼 도처에, 발에 걷어차일 정도로 흔하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 p.157 <경청>
그녀는 순무가 그저 동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잠깐씩 잊는다. 아니, 사람들이 동물이라고 말할 때, 짐승이라고 부를 때, 그 단어 속에 담긴 의미가 얄팍하고 한정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언어가 생략된 순무와의 교감이 그녀에게 이상한 안도감을 준다. 수없이 많은 말들로 소란스럽던 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던 감정이다.
헤아림과 공감, 위로와 포용.
그런 것들은 이처럼 완전한 침묵 안에서만 가능해지는 것일까.
말에 관해서라면 그녀는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말의 세계를 완벽하게 이해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해석하고, 설명하고, 반박하고, 동의하고, 고백하면서 보이지 않는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은 그저 넘쳐 나는 말들에 둘러싸여, 불필요한 말들을 함부로 낭비하는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이 한 말이 언제 탄생하고 어떻게 살다가 어디에서 죽음을 맞이하는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 p. 225 <경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