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너밖에 없어. 역시 너야."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어온 것 같아요. 무슨 뜬금없는 제 자랑이냐고 지금 눈 크게 뜨셨죠? 보통의 경우라면 저런 말들이 저에 대한 칭찬일 수 있겠죠. 하지만 가족을 비롯해 대등하지 않은 다소 의존적인 관계로 형성된 공간에서 이 말이 제게 사용되면 칭찬이 아닌 다른 짐을 얹기 위한 사전 포석, 또는 족쇄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스로 판단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없는 일인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답을 하기도 전에 이미 제 입이 봉쇄되어 버리는 무서운 말이 되거든요.
어렵게 배워가고 있습니다. 전에 라면 밤을 새워서라도 혼자 하기 싫어 죽겠는데도 해내야만 했던 일들. 특히 그 일들이 제 능력 밖의 일임에도 그들에게서 제가 못한다고 답을 했을 때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하겠다고 대답하던 때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얼마 전부터는 선을 긋고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한다면 해줄 수 있는 범위를 되도록 정확하게 말하려고 합니다. 굉장한 용기를 내서 말이죠. 말을 하고 나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흐를 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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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관계가 한쪽의 희생이 전제가 되어야 평화롭게 유지된다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한 사람이 좀 더 귀 기울이고, 상대를 배려해 주고 그래야만 순탄하게 관계들이 유지가 된다고 믿었거든요. 그러다가 아주대 심리학과 김경일 교수가 강의하는 내용을 듣고 충격을 받았죠. 자신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타인들을 위해 희생하며 살았던 이들이 공통적으로 생의 후반에 이를수록 "무만감"이라는 감정에 사로 잡히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절망감"은 희망을 꿈꾸었다가 그게 이루어지지 않아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지만, 희망이라는 살아있는 생생한 감정을 품어야 느낄 수 있는 것들이라 그나마 절망감이 생긴다는 것이 더 나은 일일수도 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무만감"은 무엇을 해도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고통을 느끼는 통각조차 무뎌진 상태랍니다. 사람이 사람이 아닌 로봇이 되어 버리는 것과 같다고 할까요?
맛있는 것을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 재미있는 영화를 보아도 다른 이들이 웃는 모습을 지켜보다 '대체 저들은 왜 웃는 거지?'라는 생각을 들만큼 그런 풍경들이 무채색으로 다가올 때, 무만감을 오래 느낀 이들이 삶에 있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또 하나 인터뷰에서 재미있는 통계를 이야기했는데 로또 복권에 당첨된 이들의 삶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조사했다고 합니다. 보통 가장 많이 변하는 것이 배우자를 바꾸는 일이라고 해요. 저 사람이 나에게 어떤 배신감을 안겨줄지 모른다는 불안함과 전에는 삶에서 가장 귀한 반려인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못하게 하고, 무언가 자신에게서 훔쳐갈 것만 같은 사람으로 느껴져서 그런답니다.
그리고 평상시 삶에서 하고 싶었던 위시리스트가 없던 사람들이 로또 복권에 당첨되었을 때 상상할 수 없는 큰돈을 한꺼번에 지출해서 다 써버리고, 그 지출에 대한 뒷감당이 되지 않아 오히려 더 큰 곤경에 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랍니다. 가령 100억짜리 요트를 구입하고 요트정비 비용과 정박장소 대여비 등을 감당하지 못해서 결국 팔아버린 사람도 있답니다. 이런 식으로 평상시 하고 싶었던 것이 없던 이들은 갖게 된 부를 온전히 누려보지도 못하고 곁에 외로움을 틈타 꼬여든 사람들에 의해 다 탕진하고 전보다 더 가난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네요.
눈앞에 1억이 있다고 생각하고 하고 싶은 위시리스트를 작성해 볼까요? 우리, 일단 상상만 한번 해보시게요. 내 통에 팍 꽂힌, 1억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요. 1번부터 10번까지만요.
1. 1달 쉬기
2. 남해& 동해 여행하기
3. 라이카 35mm 렌즈 구입하기
4. 악기 구입(플루트 골드 도전!)
5. 반얀트리 1박 2일 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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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보려고 하니까 5번으로 끝나요. 생각이 더 안 나는걸요. 여러분은요? 강의에서는 삶을 온전히 누리기 위해 위시리스트를 만든 사람만이 이런 뜻밖의 행운부터 시작해 삶을 더 풍요롭고 윤택하게 누릴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누군가의 언어의 속박에 의해 나 스스로의 가치나 의미를 한정하지 말고,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평상시에도 늘 귀 기울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위시리스트가 일상의 에너지팩 1개가 되어 마음이 가라앉는 날에는 그걸 꿀꺽 삼켜 다시 충전할 수 있다면 무만감 따위의 습습하고 어두운 감정들은 금방 날아갈 수 있겠죠? 숨겨둔 일상의 에너지팩 있으신가요? 생각보다 별 거 아닌, 소소한 나만의 것들. 일 끝나고 마시는 맥주 한 캔(제발 한 캔만으로 끝나길요.) 소소하지만 그동안 주어진 일을 해내기 위해 , 가족을 위해 미뤄두고 잊고 있었던 평상시 꼭 하고 싶었던 여러분들의 위시리스트로 무만감 아닌 모든 것들이 충만한 자신만만감으로 오늘 하루를 보내실 수 있길요. 꼭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