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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Dec 10. 2023

뭣이 중헌디




 카메라를 받았다. 고속버스 택배로 받은 세상 따끈따끈한 신상이자, 오래 기다린 빛나는 전리품을 품에 안고 만지작거리느라 바쁘다. 요리보고 저리 보고 돌려보고 다시 보고. 전 세계 한정 1000대 중 1개, 여러 가지 우여곡절 끝에 내게 온 녀석인지라 머리맡에 올려두고 자다 깨다 하면서 한 번씩 손으로 더듬어 존재를 확인하고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순수한 탐욕의 불길이 인다. 유려한 몸체를 쓰다듬고 있으면 손 끝에서 내 온기에 동화되는 카메라가 느껴진다. 이토록 짜릿한 서늘함이라니. 바디까지 한 손으로 착 감아 안을 수 있는 무게와 크기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이렇게 완벽한 합감이라니! 아, 신이시여, 물욕 쩌는 저를 부디 용서하소서!




 가방에 배터리, 펜, 시집 한 권, 수첩, 선크림을 넣고 길을 나선다. 휴대폰 수리센터를 들러 근처 수덕사에서 새로운 카메라로 낯익은 공간을 낯설게 둘러보기로 한다. 좀 더 느린 걸음으로 동그란 뷰파인더를 통해 이곳을 보면 또 어떤 다름이 보일는지 자뭇 궁금하다. 지루한 센터에서의 대기도 인내하고 배고프다 알려대는 위장도 무시하며 드디어 수덕사에 도착해 입구의 무인매표소에서 발권을 해 정문을 향해 걷는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내 발 밑에 깔리는 중이다.  


 

 위잉, 전화가 온다. 오늘 담낭에 이상 증상이 있다는 소견으로 복부 초음, 아니 CT를 찍는 동생에게서 온 전화라 허둥지둥 받는다. 토요일 예약할 것이 있어 조카의 수업일정을 알려달라는데 목소리가 너무 안 좋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다. CT 촬영 결과는 오후 4시에 나온다는데 검사도중 안 좋은 소리라도 들었나 싶어 황망함에 뭐라 위로도 전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화를 끊고 입구에 잠시 멍하니 잠시, 아주 잠시만 그렇게 서 있었을 뿐이다.



  내가 주차한 사찰 입구의 소형 주차장 맞은 편인 대형 주차장에 관광버스 3대가 연이어 들어오고 거기에서 정말 알락달락 화려한 옷들의 할머님들께서 연신 내리시는 걸 보고 걸음을 재게 놀려 앞서 왔더랬다. 조금이라도 호젓한 경내를 보고 싶은 욕심에 속도를 냈는데 동생 전화로 생긴 빈 틈 사이, 우리나라 K할머니들의 부지런한 걸음을 잊은 나의 오판으로 잠시간 나는 할머님들께 포위되고 말았다.



 그때, 갑자기 내 옆으로 동백꽃색의 형체가 툭 쓰러진다. 쓰러지며 나를 붙드는 손길에 놀라 카메라 스트랩이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온지도 모르고 반사적으로 부축의 손길을 내밀자, 나란 기둥이 제법 믿음직스러웠는지 아예 두 손으로 나를 붙들고 기대신다. 그예 툭, 내 발끝에 널브러지는 형체 하나. 아... 아직 케이스도 씌우지 못했는데, 품에 있던 카메라가 발 밑으로 수직 낙하하고 말았다. 동백꽃 지듯, 수직으로 툭... 그렇게 덜그럭.












 속으로 욕이 나온다.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한 거친 자음들이 분수처럼 솟구쳐 올라온다. 횡액처럼 나를 덮친 형체를 옆으로 풀썩 걷어내고 싶다. 왜, 나한테 이러느냐며 신경질적으로 팍 떼내어 버리고 싶다. 이거 어떻게 할 거냐고 마구 되묻고 싶다. 그것도 아주 되바라진 목소리로 눈 크게 뜨고 말이다. 솟구치는 화기에 마스크를 뚫고 코에서 김이 나오는 게 느껴진다. 떨어진 카메라를 어떻게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내 맘 다스리는 일부터 시도해 본 뒤에야 가까스로 내 품의 그녀를 안아 세운다.



 가까이 보니 색이 바랜 점퍼, 신발코가 닳아진 오래 신은 신, 보풀이 일어난 가방, 그리고 마른 손, 여러 겹 깊게 파인 목의 주름, 검버섯이 가득 덮은 얼굴에 눈길이 머물자 당혹스러움에 흔들리는 동공이 보인다. 뒤에 오던 할머님 무리들 사이

"어매, 어쪄. 비싼 카메라 같은디 떨어뜨리고 근댜아!"


이 말에 동백꽃 그녀가 내 발 밑을 보다 숨결이 가빠진다.


"내, 내가 이런겨?"



- 예, 할머니. 멀쩡히 서 있는 저를 이렇게 밀치셔서 저 사단이 벌어졌죠. 대체 왜 앞도 안 보시고 걸으셨단 말입니까아아!



입 밖으로 뚫고 나올 듯 뾰족 거리는 말들을 꾹 눌러 삼킨다. 속이 더부룩하다. 다시 한번 심호흡을 한 뒤 목소리를 내본다.


"어디 편찮으세요? 할머님, 어지러우신가 봐요."


간신히 꺼낸 한마디.


"그게 내가 무릎수술받고서 츰이로 이렇게 나온건디, 이게 내 맘대로 안 움직여서... 여적 계단 하나 못 지나고 이렇게... 이렇게 허다. 어쩐댜. 새댁 물건을..."



 무릎 수술을 받고서 오래 두문불출하시다 친우들과 나온 걸음이라 시는데 행색이 너무 초라하다. 이런 날 보통 할머님들은 친구들한테 지기 싫어서라도 더 환하고 이쁘고 곱게 꾸미고 나오실 텐데, 같이 오신 듯한 주변분들은 삼삼오오 걸으며 팔짱도 끼고 소란스레 핸드폰으로 입구부터 촬영하느라 바쁜데 동백꽃 그녀 주변엔 사람이 없다. 다리도 아프다는데 부축할 친구도 없이 혼자 입구 높은 계단을 오르다 균형을 잃었던가 보다.

상황머릿속에 그려지니 한숨과 함께 분기가 빠져나간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카메라를 주워 어깨에 메고 할머니를 부축해 계단이 없는 옆 길을 따라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드렸다.  길이 오르기 더 편하실 거라며 귀뜸해 드렸지만 힘겨워 보이는 뒷모습이 계속 눈에 밟힌다.



 그러다 어깨에서 덜렁대는 내 카메라의 기척을 다시 느꼈다. 입구 부도 사리탑 등을 모셔놓은 공간으로 숨어들었다. 후다닥 뛰어든 나는 사람들을 피해 낮은 담벼락에 기대 몸을 숨긴 뒤 카메라를 살피기 시작했다. 바디가 까지고(내 살이 패인 기분이다!), 조리개 버튼에 흠이 크게 생기고, 렌 후드의 우아하고 유려한 곡선에 침 흘리며 쓰다듬었는데, 지금은 처참하게 안쪽으로 말려 찌그러졌다. 고... 곡선이 뭉개져버렸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될 수 있을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카메라를 떨어뜨려 본 적이 없기에 당혹스러움은 배가 된다.


 오늘이 첫 외출인 이 녀석에게 생긴 데미지가 너무 크다.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입을 막은 채 혼자 소리를 질렀다. 누가 들으면 수덕사에 멧돼지 한 마리 출몰했다 놀랄지도 모를 정체불명의 신음소리가 풀밭 위로 흩어진다. 오늘 사회면에 뉴스가 나간다면 친히 고해 주시라, 그 멧돼지는 인근에 사는 사람돼지 똥오기였노라고...










 반도카메라 대리님께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고 카메라와 렌즈 사이 유격이 생긴 것 같다는 자체 판단과 함께 이상 유무를 확인해 달라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대리니이이임. 우어어어엉. 카메라가, 어제 온 게, 마아아앙가자졌으요오오. 어헝헝헝."


다 큰 것이 때 아닌 불운에 눈물콧물 쏟아내니 놀라신 대리님, 신속한 접수로 AS 예약을 해주신다. 어찌 됐든 수덕사를 빠져나가 보령에 가야만 보낼 수 있는 택배니 마음을 추스리고 경내를 걷기로 한다. 사부작사부작, 저만치 멀어진 할머님들 뒤로 느릿하게 올라가는 걸음.



 내 욕심으로 카메라 먼저 챙기느라 기대 오는 손길을 밀쳤다면 동백꽃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친 무릎을 다시 다치거나, 노쇠한 몸이 충격을 견디지 못해 어디 하나 부러지기라도 했다면 어쨌을까? 그럼 몇 달을 다시 누워 있었어야 할 텐데, 지루한 날들이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가정들이 머릿속을 맴돈다. 나는 착하지 않다. 지극히 세속적이고 지극히 현실적이며 지극히 탐욕적이다. 하지만 상대의 사정을 모른 채 다그치며 이거 어떻게 할 거냐 으름장을 놓기에는 카메라줄을 내 몸에 꽁꽁 묶어놓지 않은 내 잘못도 크다는 생각도 해가며 동백꽃 그녀의 안녕을 가만히 기원한다. 지금은 옆에 다른 할머님들이 좀 같이 걸어주고 있을런지. 노년의 외로움은 슬프다.




사천왕상의 용 눈에, 탱화 속 인자한 부처님 미소에 가만히 마음 한 자락 달래주라 떼를 써보며 족히 수백 년은 됨직한 비탈진 산자락의 나무들을 눈에 품는다. 나도 늙는다. 언젠가 힘이 없어 가다 저리 풀썩 쓰러질지도 모른다. 그때 나를 부축해 주는 이는 음, (박해일 씨로 지정... 아, 그때 되면 그 분. 나보다 더 걷는 게 힘겨울 수도 있겠구나.) 불특정대상에게 미리 선행으로 이리 대비했다 생각하며 마음을 달랜다. 역대 최단기간 AS접수 기록을 경신했을 오늘, 이런 마음먹은 한국의 똥오기를 불쌍히 여겨 주사 라이카 회장님이 수리비 좀 깎아주면 안 될까? 집에 돌아와 아침에 나가며 버렸던 택배 박스를 경비실 분리수거실에서 발견해 뾱뾱이까지 다시 주워 들고 올라와 포장을 해서 고속버스에 실어 보내는데 피식 웃음이 난다.






"그려, 뭣이 중헌디. 사람이 제일이지. 안 그려?"















* 같이 듣고 싶은 곡


 낯선 아이 : 기상청


https://youtu.be/Mnn_T10UIf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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