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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Mar 01. 2024

빛이 가는 길








 이끼가 푸르스름하게 덮인 묘지석, 녹슨 왕조의 유물 같은 청녹빛에 가려진 사진 속 이름자를 들여다봅니다. 상하이의 만국공묘, 오래된 외인 묘지에 놓인 "LI YOUNG SON". 비석에 새겨진 이름은 희미합니다.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젊은 영혼을 아십니까?


 글을 읽다 보면 문자로 남은 한 사람의 생애가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질 때가 있습니다. 마치 무성영화처럼 인물이 제 눈앞에서 움직이며 생명력을 갖춘 하나의 존재가 되죠. 이영선, 외인묘지의 묘지석에 적힌 이름을 가진 이 또한 그랬습니다. 궁금해 찾아본 사진 속 빛나는 안광을 가지고 정면을 응시하던 어린 청년이 며칠 내내 꿈속에서 상하이 중심거리를 달리며 일본인 경찰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깊은 밤 대륙을 가로지르는 열차에 올라 품 속에 감춘 독립신문과 기밀문서를 여러 번 살피며 쪽잠을 자는 영상들이 그려졌죠.


 기묘한 경험이었죠. 무엇 때문에 이름 하나로 시작된 궁금증이 여러 날 나를 붙들고 있을까 살짝 무서워질 지경이었어요. 아직 이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그의 영혼이 가엾어서 그런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조사가요. 어쩌면 아주 나중에라도 그를 기리는 단편소설이라도 쓰고 싶어서요.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상해로 넘어가 임시정부 일지를 열심히 뒤적여 본다 해도 당시 활동했던 독립지사들에 대한 자료들 속에서 그의 행적을 만나는 일은 쉽지 않을 거라 생각이 들더군요. 어렸고, 빨리 세상을 떠났고, 그렇게 저버린 꽃들은 당시에 너무도 많았으니까요. 간신히 모아 본 자료들 속 그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 1905년 평안북도 철산 출생
- 1919년 임시정부의 기밀문서와 독립신문을 국내에 전하다 붙잡혀 18개월의 옥고를 치름
- 1926년 한인무장조직 "병인의용대"에 가입
- 1926년 순종 인산일 거사를 위해 국내에 잠입하다 현지경찰에 체포
- 현지 경찰이 일본 조계지 경찰에 사건 이관
- 21살 이덕삼 고문 끝에 상하이 일본 경찰서에서 사망
   상하이 만국공묘에 안장



 임정기관지 독립신문이 1926년 9월 발간 신문에 "열사 이덕삼의 일생"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려있습니다. 생을 바쳐 조국의 광복을 위해 노력하다 세상을 떠난 이덕삼 열사를 추모하기 위한 글이었죠.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간 이들에게 앞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에 대한 화두를 던져 준 귀한 청년의 마지막은 외인묘지 한 귀퉁이의 작은 직사각형 위에 새겨진 이름자뿐이군요.









 조국 해방이 이루어진 지 80년이 되어갑니다. 한중수교가 재개가 된 후 30년이 훌쩍 지났고요. 그동안 다른 독립지사인 박은식, 신규식, 노백린, 김인전, 안태국 등 독립지사의 유해가 한중 협의를 통해 한국의 국립묘지로 봉환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지사의 유해는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 번 유해 봉환을 중국 측에 요청했지만 유해 연고권이 있는 자손을 데려와야 유해를 넘겨줄 수 있다는 중국의 주장에 의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이 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질 리 없기에 그가 돌아올 날은 기약 없이 미뤄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기억하고 싶었습니다. 22년 8월 14일 연합뉴스 차대원 상하이 특파원의 기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된 한 청년, 이영선지사의 유해가 지금이라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와 다른 독립지사들과 같이 영면에 들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힘을 모으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가능할 일인데, 잊혀 가는 이름이 너무도 많은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시대에 묻혀 모든 일들에 무감해질까 가끔은 두렵습니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조희영 : 먼 동이 틀 무렵

https://youtu.be/CeXeYy-3Tk0?si=uaHxCkR6XFZRm2c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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