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은 고요한 숨으로 어둠을 내몰고 있습니다. 멀리 풀숲에서 수런수런 속삭이는 새들의 소리만이 고요를 깨우고 있죠.외딴 은하처럼 멀리 있어도 같은 하늘아래 살아가는 걸로 위로를 삼던 우리가 맑은 풍경소리를 들으며 함께 걷고 있습니다. 마침내.
달그림자를 덮고 잠든 별빛이 아직 채 깨어나지 않은 산사를 찾아 이른 아침을 먹습니다. 바투 앉은자리에서 서로의 무릎이 닿아 번지는 온기가, 아직걷히지 않은 새벽의 찬기운을 밀어냅니다. 스치는 느낌이 좋아서 다가앉습니다. 맞물린 무릎의 오목뼈가 인장이 될 수 있다면 이대로 오늘을 봉인하고 싶더군요.
구부러진 길을 걷습니다. 길가에 자라 있는 수직의 나무들 곁에 서 봅니다. 곧은 줄기를 덮은 수피는 견고하고 두툼해 어떤 것도 틈타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산사의 수문장들이 이리 많은 걸 보니 사찰 안에 모셔 둔 잠든 영들의 고요가 참 부러워집니다. 그들의 잠은 몇 겁의 윤회를 지나도록 온전히 평온할 것만 같습니다. 여기 어디쯤, 나도 가만히 놓아둘 수 있을까 욕심을 내보고 싶습니다. 오래된 수령의 나무 아래 한 줌 풀씨처럼 묻혀있다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산사의 연혁도, 고승이 꽂아 둔 지팡이가 변해 자라났다는 번개를 맞아 반이 타버린 오래된 나무도, 영혼을 위로하는 작은 전각도, 흐르는 물빛이 일렁이며 드리운 햇살의 주렴이 눈부신 누각도 제 마음속 자리한 결 고운 한지 위, 압화로 남습니다.
무소유의 길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정오의 태양을 등에 업고 걷다 보면
정말 중요한 걸 알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뜨거운 태양빛을 가늠해 보다 그걸 이겨내고 걷겠다며 억지를 부리는 제 치기를 가만히 바라보다 한 말씀하시더군요.
"넌 풀소유라 안 되겠다."
툭 던진 말에 한참을 웃습니다. 카메라에 가방에 주렁주렁 몸에 걸친 것들을 내려놓기 전에는 어림도 없다며 손사래를 치셨거든요. 그러다가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제가 정말 갖고 싶었던 것은 언제나 내 곁에서 같이 웃는 당신. 웃어 줄 당신의 미소였던가 봅니다.
내가 모르는 시간만큼의 당신,
나와 함께한 당신,
그리고 언제고 혼자 남게 될지 모를 당신,
내가 모르는 시간 속의 당신.
모든 순간이 욕심납니다.
인연이 소중한 이유는 주어진 생에 단 한 번의 맺음이라서죠. 우리가 걷는 걸음이 그려가는 동심결. 마지막 매듭은 더디 맺으며 사목사목 걷고만 싶습니다. 아주 오래도록 이요.
계절이 고요히 흘러, 다시 이런 날이 찾아온다면 깊어진 눈빛의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두북두북 내린 눈에 덮인 대숲처럼 당신과의 기억만이 내게 남는 날이 온다면. 미뤄두었던 매듭, 그때 드리울게요. 평온한 당신의 잠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