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에 있던 번잡한 생각들을 덜어내지 못하고 오른 무대가 있었어요. 연주를 위해 멀리서 온 전공 선생님들도 있는데 정신 차리자고 혼자 허벅지도 꼬집어 보고 먼 산 보고 숨을 고르고 있다 무대에 올랐죠.
저는 늦게 플루트를 배웠어요. 초등학교 때 동생과 멋모르고 논길을 걸으며 불던 리코더에서 길고 곧은 선을 뽐내는 플루트를 처음 접하던 날. 손에 감기던 금속악기의 서늘한 온도가 제 손의 열기를 식히며 다가오는데 참 좋았습니다. 그리고 새가 지저귀는... (아, 이런 소리는 장 피에르 랑팔이나 최나경 씨의 연주에서 들을 수 있다는 걸 일단 염두에 두고 들으셔야 해요.)
해양수련원 다목적 강당 개관식이라 외부 손님들이 많이 오신다고 "임팩트 있는 강렬한 곡들(담당공무원님 말씀)"로만 부탁하신다며 우리 플루트 선생님께 당부하셨다는데... 음... 이 분, 개관식날 정전에 대해선 생각도 못하셨을 거예요. 총 5곡 중 3번째 곡인 베토벤 바이러스를 연주하는데, 암전! 정말 갑자기 무대 위 조명이 갑작스럽게 툭, 꺼져버렸죠. 마치 누가 입김으로 꺼버린 촛불처럼요.
처음에 들던 생각은 조명을 하이라이트로 임팩트 있게 무대 위로 보내주려고 전체 암전이란 무리수를 두시나 싶었죠. 그러니 곧 다시 조명이 환하게 켜지겠지 하는데 무려 1분 가까이 정전이 이어지더니, 나중에는 허둥지둥 강당 안에 있는 창문의 커튼만 걷어주시더군요. 정전 사태를 수습하시기 위해 달려가신 선생님을 제외한 나머지 연주자들은 별일 없다는 듯 연주에 집중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다시 무대로 돌아오시는 선생님 손의 플루트가 마치 다스베이더의 광선검처럼 보이는 건 저만의 느낌일까요? 전사 같죠? 해결이 되지 않으니 화가 단단히 나서 돌아오셨죠. 선생님 께서 다시 자리로 돌아오실 때까지 바로 옆에 있던 저는 조마조마하며 배에 힘주다 개복치 될 뻔했죠. 자기 입김에 배가 터져버린.
공연이 끝나고 오랜만에 신은 힐로 부은 발을 꼼지락거리며 배를 쓰다듬다가 이 생각이 들더군요. 살면서 뜻하지 않은 일들을, 제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들을 만났을 때 걱정과 근심으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면 제게 무엇이 남았을까라는 생각이 말이죠.
정전이라고 그 무대를 포기하고 모두 연주하던 걸 멈추고 그냥 내려왔더라면 호흡이나 전체 분위기가 흐트러져서 다음 무대가 똑같지 않았겠죠. 행사와 관련된 관계자들은 더욱 당황했을 테고 말이죠. 평정심 유지하고 자신이 연주할 파트를 끝까지 놓치지 않고 하신 전공선생님들 보면서 또 배우던 날이었어요.
제가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최선으로 하루를 살아가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오르고 내리고, 휘고 꺾이는 부침이 많은 시간이 온다 하더라도 스스로의 마음에 자리한 추가 요동치 않고 확고한 중심을 잡고 있다면 모든 것들을 무탈히 흘려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그런 다짐으로 하루를 보냅니다.
예측불가한 날들을 앞에 둔 우리에게 필요한 주문이에요. 이런 주문 필요 없다면 반품해 주세요. 반품상자 모른 척하렵니다. 후다닥, 도망! (서... 설마 진짜 반품하시기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