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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Oct 29. 2024

영원한 천국

정유정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다 보면 영웅들의 성장기에 주어진 과제들을 돕는 신들의 등장이 언제나 놀라웠죠. 내가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순간 나의 운명이 결정되는 지극히 사소한 순간들. 운명의 터닝 포인트가 내 의지가 아닌 신들의 참여 덕분이라는데, 그 신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기에 제 인생에는 관여할 시간이 없는지 궁금하기도 했죠.



 신들의 손 끝에서 복마전을 벌이는 인간들의 나날은 왜 전쟁이 끊이지 않는 건지, 신들의 체스판 위의 조그만 말들에 불과한 인간들의 심중에 있는 탐욕과 이기의 무게로 바람의 방향조차 바뀌는데 그 모든 것이 저들의 의지가 아닌 신들의 의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역사 속 많은 사건들의 급작스러운 종결이나 새로운 등장을 바라보며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적 신들에 밀려나 잊혀 가는 신들이 있죠. 이제 인간이 신들의 자리를 노리고 있어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우주를 향한 갈망이 이진법의 세계로 옮겨져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그들의 도움으로 새로운 성채를 구축 중이죠.



 새로운 성채 안 세상은 "모두 평등하고, 뭐든 할 수 있고, 아무도 죽지 않는 세계, 영원한 천국." 그곳에서 인간은 과연 평화로워질 수 있을까요? 결코 후진할 수 없는 과학. 세상의 바람이나 우려에도 불구하고 발표된 이론들은 누군가의 연구로 새로운 내용이 더해져 금세 놀라운 창조물을 만들어 내고 있죠. 세계와 세계의 국경이 대륙간의 경계가 아닌 인간이 외피를 벗어버리고 의식만이 업로드되어 데우스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날이 오게 될 지도요.



 그런 세상이 온다면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정유정의 신작 <영원한 천국>은 이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나는 그 남자의 집에 초대되었다.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머뭇대지 않고 출발했다.





 임경주라는 남자의 의뢰로 롤라라고 하는 가상 세계에서 드림시어터를 설계하는 디자이너 이해상은 그의 집을 찾게 됩니다. 그가 원하는 대로 그의 드림 시어터를 만들기 위해서요. 거대 네트워크이자 빅 데이터이며 통합 플랫폼인 롤라는 말 그대로 게임과 커뮤니티 영상 혹은 방송 채널이 무한대로 생성되고 소비되는 곳입니다. 지상의 동화와 지하의 신화가 동시에 구현되는 가상 세계도 존재하죠. 하고 싶은 일을 실제적으로 경험할 수 있되 어떤 일을 벌여도 처벌받지 않고 자신이 되고자 하는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세상이죠.



 그중 가장 인기 있는 롤라극장은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 살아보는 것이고, 내용 속 주인공이 죽음을 맞아야 한 편이 막을 내리는 구조로 운영이 됩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그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기묘한 공간이죠.  개인 극장도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드림시어터"입니다. 드림시어터 제작자로 명성이 자자하지만 지나치게 사실적이고 냉정한 설계로 주인공들에게 잊지 못할 결말을 선사하는 이해상을 부른 임경주는 자신의 삶, 그것도 기억 속 빈 여백이 존재하는 시간에 대한 탐색을 시도하고자 합니다.

 


 비어버린 기억, 백지에 있던 내용을 어떻게 환원해 내용을 채우게 할 수 있을까요? 드림시어터를 설계하는 해상은 그에게 어떤 거짓도 없이 살아온 삶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말하죠. 경주의 입이 열리며 우리는 해상의 롤라와 경주의 삼애원, 그리고 경주의 드림 시어터 속으로 종횡무진 빠른 속도로 오가게 됩니다. 내릴 수 없는 열차에 올라타 결말이 나오기까지 꼼짝할 수 없습니다. 정유정의 소설이니까요.




정정주 Moving light 2023-1









정유정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었습니다.  

 내 심장을 쏴라

 7년의 밤

 28

 종의 기원

 진이, 지니

 완전한 행복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



 꾸준히 탐구해 오던 인간성, 인간의 의지, 삶을 살아내는 인간의 자세 등을 가지고 더 넓은 공간에서 실험을 합니다. 어떤 것도 할 수 있고,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지만 처벌받지 않는 롤라라는 가상공간에서 인간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가란 질문을 던지죠. 사피엔스의 외피를 벗어던진 인간들이 데우스의 세계에서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 그녀가 던지는 우리 인간들의 삶의 방향에 대한 질문은 무겁고 진중해요.



 역순으로 파고드는 등장인물들과의 관계는 팽팽하게 조여진 첼로의 현과 같아요. 서로의 삶이 활이 되어 상대방의 현에 닿으면 한꺼번에 여러 음들이 공명하듯 흘러나오죠. 그리고 닿은 시점에서 은근히 보이는 인물들의 연결고리가 예기치 못한 반전을 선사하며 지나온 이야기 속 숨겨진 또 다른 복선을 되짚어 보게 만들죠.



 어떤 이도 위안이 되지 않았다. 매 순간 허상이라는 자의식이 끼어들었다. 그들은 자기 의지로 움직이는 자가 아니었다. 내 기억이 만들어내는 대로 움직이는 자들이었다. 또 다른 고통을 상기시키는 촉매이기도 했다. 그 고통에는 분명한 이름이 있었다. 내가 떠나온 세상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롤라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스스로 시간의 태엽을 감아야 했다. 아침이 왔구나, 생각해야 해가 떴다. 이제 잘 시간이야, 해야 어둠이 왔다. 나는 내가 만든 사막에서 모래알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p. 382



 롤라로 업로드되어 들어온 해상의 독백의 일부예요. 영원한 천국에 들어왔지만 스스로 가둬버린 기억의 화약고를 품고 사막을 떠돌던 그녀가 자신을 그곳에 들어오게 만든, 혹은 도운 경주를 롤라로 데리고 오기 위해 끊임없는 시도를 하죠. 경주의 의뢰로 그를 찾았지만, 기억해야만 하는 이름들을 모항성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경주의 세상에서 그녀의 설계는 마음대로 작동되지 않죠. 그리고 그것을 작가는 "견디고 맞서고 끝내 이겨내고자 하는 인간의 마지막 욕망, 즉 야성"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내 삶의 주체로 살아가는 일. 시대적 흐름에 순순히 굴복하거나 따르지 않고, 신들의 체스판 위가 아닌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서는 일. 다양한 미디어 속 쏟아지는 정보들에 뇌세포가 작아져가는 기분이 드는 요즘 제게 꼭 필요한 말인 듯 해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마음이 먹먹해졌어요. 겸손하게 과학에 대한 미천한 지식으로 과한 상상력만 갖고 세계를 구상했다고 하지만, 영화로 만들어져도 손색없을 소설 <영원한 천국>.



 여러분은 그곳에서 어떤 이름으로 자신의 삶을 다시 살아보고 싶으신가요?






박근호(참새) - Light Catcher-Ring













* 같이 듣고 싶은 곡


드보르작 교향곡 9번 - 신세계로부터



https://youtu.be/11SEk87juA0?si=ILRXqFKz6pLRj3VZ















#영원한천국

#햇빛은찬란전시회

#당신의천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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