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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no Oct 22. 2024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는 건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 거였어. 꿈의 잔상 속에 숲으로 걸어 나가면, 잔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파고들며 수천수만의 빛점을 만들고 있었어. 뼈들의 형상이 그 동그라미들 위로 어른거렸어.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서 무릎을 구부린 키 작은 사람을, 그 사람뿐 아니라 그 곁에 누운 모든 사람들이 살과 얼굴을 입는 환영을 그 빛 속에서 봤어. 흑백이 아니라 선혈로 얼룩진 옷을 입고 그 구덩이 속에,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부드러운 어깨와 팔과 다리로.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 작별하지 않는다, p. 316-317. 한강 저. 문학동네





권용래 작가 작품





 지극한 사랑의 감정을 언제 느끼시나요? 며칠 열감기로 떼꾼한 눈으로 저를 보다 의심 없이 와락 안겨들어 고개를 기대는 조카의 솜털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을 때,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가장 여리고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존재가 나를 믿고 기대올 때,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겠노라 다짐하게 되는 그때. 달려가 안고 싶은 존재가 있을 때 우리는 강해집니다. 적어도 마음으로는요.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원고를 탈고한 뒤 극심한 기력상실로 외출도 하지 않고 위경련과 편두통으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고통의 극점을 매일같이 느끼는 사람이죠. 그녀에게 오래전 함께 했던 친구가 연락을 해 옵니다. 제주에서 목공일을 하던 친구가 전기톱에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고 서울로 왔다는 비보를 전해요. 친구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간 그녀는 삼분마다 한번씩 수술 부위를 주삿바늘로 간병인이 찔러 억지로 피가 흐르게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창밖에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고통을 감내하는 친구가 주인공 경하에게 제주 자신의 집에 두고 온 새들 아마와 아미를 돌봐달란 부탁에 덜컥 폭설이 내리는 제주에 오게 되었죠. 서울에서 남쪽 끝 제주로 날아온 주인공 경하는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잊고 있던 오래전 꿈을 상기하게 되죠.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 잊힌 봉분. 캐내지 못한 백골들이 밀려오는 바닷물에 흐트러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 잊고 있던 오래된 꿈을 복기하며 자신이 4년 전 탈고한 소설에 대한 꿈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임을 직감하게 되고, 그녀는 친구와 친구의 가족, 그리고 제주에 묻힌 오래전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
















 소설 속 여러 가지 이미지들 중 눈 내리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등장하죠. 소설의 첫 문장도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에요. 내리는 눈은 현재형인데, 서술은 과거형이죠. 이 미묘한 시간 차이에 숨 죽이며 다음 글을 읽어 내려가게 만듭니다.  


 수증기를 타고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이 두 개의 물분자가 결합해 눈의 첫 결정이 만들어질 때 눈송이의 핵이 되죠. 우리가 과학잡지나 접사사진에서 접한 한없이 투명한 크리스털 같은 눈 입자는 반드시 이 재를 갖고 있어야 눈송이가 되고 한 시간 남짓한 하강시간을 견뎌 땅으로 내려옵니다. 수많은 결속으로 커진 눈입자들의 무한한 가지들이 주변의 소음조차 가두어버릴 정도로 고요히 이 땅에 내려와 모든 걸 덮어버리죠.


 그런 눈이 폭설로 변해 내려 덮는 제주에서 주인공은 사투를 벌입니다. 평소 앓고 있던 편두통과 위경련으로 여러 번 넘어지며 친구가 부탁한 새들의 생사를 위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뚫고 가죠. 넘어지고 찢기고, 잃어버리고, 의식을 잃었다 깨며 마침내 도달한, 도달했다 믿는 공간에서 그녀는 기이한 경험들을 하게 돼요.






여전히 어깨에 앉아 있는 아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선이 말했다.

이제 잘 시간이다, 너희.

약속된 신호인 듯 인선이 노래를 시작했다. 처음 듣는데 어딘가 친숙한 멜로디의 자장가였다. 뜻 모를 방언들로 이뤄진 첫 소절이 끝나기 직전에 아마가 같은 소절을 허밍 하기 시작해 엇박자 돌림노래가 되었다. 경이롭게 고요한, 동시에 미묘하게 어긋나는 화음이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귀를 기울이는 듯 꼼짝 않고 갓등 위에 앉은 아미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은 벽에서 움직이는 인선과 아마의 그림자를, 다른 쪽 눈은 유리창 밖 마당에서 저녁 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p. 113-114







 묻었던 새가 되살아나 새장 밖을 날아다니고, 병실에 누워있던 친구는 폭설로 전기까지 끊겨버린 집에서 멀쩡히 돌아다니며 자신이 그간 모아 왔던 "제주 4.3 사건"과 관련한 자료들을 주인공에게 보여줍니다. 고통의 극점을 경험한 이들만이 진실에 마주 설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걸까요? 마침내 인선이 모아놓은 이 섬의 이야기 앞에 귀를 기울이게 된 주인공을 통해 제3부의 막이 열립니다. 그 섬의 잊힌 사람과 시간들을 마주하는...


작가의 설정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은유적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놓인 두 존재인 주인공 경하(소설가)와 인선(목공예가, 독립영화감독)을 배치하고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들 곳곳에 깔아놓은 복선들과 동선을 따라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그로 인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버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이들의 비극을 우리가 직시하게 만들고 있죠.


 그중 계속 반복된 눈 내리는 이미지와 연니[軟泥]라는 바닷속 부유물이 깊은 바닷속 수압의 극점을 지나 내려앉는 이미지들을 꽃비가 날리는 것처럼 표현한 부분들이 전체 서술의 얼개에서 등장하죠. 바닷가로 끌려 온 수많은 민간인들이 무차별한 총격으로 살해당하고, 그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합니다. 지극히 편리한 뒤처리 방법이었다죠. 해류를 따라 어떤 시신은 쓰시마섬까지 밀려가 발견되고, 그 외 대다수는 이렇게 바닷속에 수장이 되어 연니[軟泥]가 되어 지금도 떠돌고 있다는 걸 떠올리게 만듭니다.  


 주인공 인선의 엄마가 어린 날 엄마의 심부름으로 외가댁에 갔다가 마을에 닥친 화를 피하고 학교 운동장에 끌려가 살해당한 마을 사람들 시신들 중에 가족들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끝내 찾지 못한 여동생을 찾다 집에 오던 중, 턱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고 엎어져있는 동생을 발견하죠. 피를 많이 흘린 동생을 위해 자신의 손을 깨물어 동생의 입에 넣어주죠. 옴쭉 대며 피를 빨아먹는 동생을 보며 반드시 살려야겠다 다짐하는 인선의 엄마.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중에도 한 번씩 잠든 인선의 입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 그녀의 세월을 보며 "잠들지 않는 남도"란 노래를 떠올립니다.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을 찾다가 알게 된 노래죠.


 그 뒤 성인이 된 인선의 엄마는 육지로 이송된 오빠를 찾아 대구 경산과 제주를 오가며 유가족 협의회를 통해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하죠. 1960년 대구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발견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들의 유해가 대규모 발견된 이후, 그녀의 활동이 정지됩니다. 34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인선의 엄마의 시간은 그렇게 멈춰버리고 그녀는 사라진 가족들, 사라진 집터, 정지된 삶을 허깨비처럼 살아가요. 그리고 치매 걸린 노인이 되어 인선에게 매달려 밤이면 문간을 기어와 인선의 입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고 살리지 못한 가족들을 혼자 추모하죠. 끝없는 어둠 속에서.    




 책을 다 읽은 뒤 한참을 먹먹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정신없이 검색하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순이삼촌"이란 소설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잔인하게 절멸을 위해 행한 잔인한 살육이 존재했었다는 걸 제대로 직시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만든 정교한 얼개 속에 부유하는 인물들을 다시 떠올려 봅니다. 경하, 인선, 정심. 3명의 여인들로 이어지는 서사 속에 드러나는 사실과 남겨진 이들의 목소리들이 눈처럼 제 마음에 소복하게 쌓여버렸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고 포용하는 파도소리가 되어 얼개 안에 찰방거립니다.


 소설 속 경하와 인선이 장자못 설화에 등장하는 돌이 된 여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시아버지가 쫓아낸 노승에게 몰래 시주를 한 덕분에 난리를 피할 기회가 주어졌던 여인. 절대 뒤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겨 돌이 된 여인을 이야기하며, 그녀가 돌아본 이유가 무엇인지를 서로 묻는 장면이죠. 그것이 어쩌면 이 소설에 대한 답일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삶 속 자신의 심장이 돌로 굳어가는데도 그들이 계속해서 그날을 되짚어 보는 이유, 여러분은 무어라 말할까요? 이 소설을 읽고요.  






 주어가 비어 있는 책의 제목을 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 당신은, 나는, 우리는... 결코 작별하지 않는다. 진실이 밝혀지는 그 순간까지. 저는 주어를 이렇게 채워보며 책장을 덮습니다.  





















* 알쓸범잡 중 4.3 사건에 대해


https://youtu.be/EBPaaGEizzU?si=8k_7hpoohfIfQezE








* 같이 듣고 싶은 곡  


잠들지 않는 남도 - 안치환


https://youtu.be/uYW7El4t3Uo?si=6Yv6M8-otJzqab1w












#작별하지않는다

#잠들지않는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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