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는 건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 거였어. 꿈의 잔상 속에 숲으로 걸어 나가면, 잔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파고들며 수천수만의 빛점을 만들고 있었어. 뼈들의 형상이 그 동그라미들 위로 어른거렸어.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서 무릎을 구부린 키 작은 사람을, 그 사람뿐 아니라 그 곁에 누운 모든 사람들이 살과 얼굴을 입는 환영을 그 빛 속에서 봤어. 흑백이 아니라 선혈로 얼룩진 옷을 입고 그 구덩이 속에,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부드러운 어깨와 팔과 다리로.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 작별하지 않는다, p. 316-317. 한강 저. 문학동네
여전히 어깨에 앉아 있는 아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인선이 말했다.
이제 잘 시간이다, 너희.
약속된 신호인 듯 인선이 노래를 시작했다. 처음 듣는데 어딘가 친숙한 멜로디의 자장가였다. 뜻 모를 방언들로 이뤄진 첫 소절이 끝나기 직전에 아마가 같은 소절을 허밍 하기 시작해 엇박자 돌림노래가 되었다. 경이롭게 고요한, 동시에 미묘하게 어긋나는 화음이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졌다. 귀를 기울이는 듯 꼼짝 않고 갓등 위에 앉은 아미의 얼굴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의 한쪽 눈은 벽에서 움직이는 인선과 아마의 그림자를, 다른 쪽 눈은 유리창 밖 마당에서 저녁 빛을 받으며 흔들리는 나무를 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 같은 걸까.
p. 11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