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상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우리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 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 (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마음껏 가엾다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에 우리 자신이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할 때뿐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렇게 느낄 수가 없다. 우리는 교통사고 사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있지만 같은 방식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는 없다. 손써볼 사이도 없이 발생한 사고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는 이들을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단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죽어가는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이 엉망진창인 시스템을 방치한 우리 자신에 대한 수치심 때문에 몸서리치는 것이다.
-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중에서. <눈먼 자들의 국가>, p. 73-74 중
눈물을 흘리며 싸우는 이들, 니체가 표현했던 대로 열매를 "손수 따는 "이들의 형상을 발명하며 다양한 상상과 질문의 방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설령 이 시적 상상들이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가진 상상과 사유의 벽돌은 '온정이 베풀어질 때까지 너는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윤리적 독재를 부술 수 있을 것이다. (중략)
잔해 속의 벽돌 하나를 들고서 자기 집이 한때 어땠는지 기억하려는 사람. 무엇이 그 집을 부쉈는지 알고 싶은 사람. 진실과 용기가 살아 있음을 믿고 싶은 사람. 브레히트의 "벽돌 들고 다니는 사람"은 광화문 앞의 유가족들을 꼭 닮았다. 세계의 거짓과 태만이 그들의 집을 부쉈다. - 동일 저자 글 p. 84 중에서
그가 노래한다. 살아간다는 것은 별이 되어가는 것이다. 별이 되어간다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중략) 인생은 금물이라는 말은 인생은 금물이라는 말일뿐이다. 진술과 효과가 일치한다. 그냥 그렇다는 말인 한에서, 그 말은 가슴을 찢는다. 인생이 금물이라는 것을 누가 모르더냐? 알면서도 모르는 채 살고자 했는데, 살아보고자, 의미도 만들고, 의미를 구성해서 인생 주변에 화환처럼 둘러놓고, 희망의 안대를 끼고, 이 세계의 처참한 장면들을 선별적으로만 바라보고, 비극과 부정의와 참상에,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모습들에 눈감으로 살고자 했는데, 그걸 또 일러주는 자들이라니.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안 될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라니. 그렇게 말할 수 밖에는 없을 정도로 부서진 자들이 있다는 사실. 내 인생은 '금물'인데, 당신은 무엇을 하며 즐기고 있는가, 물어오는 자들. 미래의 피폭자들, 암환자들, 이주노동자들, 탈북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실업자들, 강정에서, 4대 강에서, 용산에서, 크레인 위에서, 우리 시대의 구조적 폭력에 절망한 모든 인간들. 배제된 자들, 세월호에서 죽어간, 살아남은, 그 죽음과 생존을 목도한 우리 모두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누군가 부르고 있는 노래. 인생은 금물...
- 김홍중, <그럼 이제 무얼 부르지?> p. 1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