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 열린다. 하늘로 향한 커다란 통창을 지나 쏟아져 내려오는 햇살이 홀 전체를 환하게 빛나게 만든다. 유려한 곡선과 날카로운 직선이 교차하는 벽면의 선들을 따라 다양한 그림들이 배치되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전시장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너도나도 그의 그림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거대한 벽화부터 시작해 그가 평생을 써 온 노트들이 전시된 공간까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이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나는 전시장 가장 깊숙한 곳으로 향한다. 미리 보내준 전시장 내부 안내도 제일 안쪽 비밀 통로처럼 숨겨진 곳이다. 점점 발걸음이 빨라진다. 얼마만인가. 드디어 그를 볼 수 있다. 조명을 일부러 없앴다는 공간의 코너를 돌자 어두운 불빛에도 나뭇결이 빛나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있다. 그리고 벽에 기대어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보며 앉아있던 그가 보인다. 나를 보자 삐뚜름한 입가의 미소를 지으며 그가 몸을 일으킨다. 풍성한 결로 흔들리고 있는 흰 머리칼. 몸에 맞게 재단된 슈트. 풀어헤친 셔츠의 칼라. 그리고 여전히 맨발이 좋은 듯 신발을 벗고 밀쳐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난다.
아무 말 없이 서로 끌어안는다. 손 끝에 닿은 온기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올 것 같은 흐느낌을 참느라 더욱 깊이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얼마나 오래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을까. 간신히 고개를 든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거 봐, 살아있기를 잘했잖아!"
그제야 내 등을 감싸고 있던 팔을 풀고 느슨하게 늘어뜨리고 곁눈으로 흘낏 나를 본 그는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내 머리를 흐트러놓는다. 아끼는 강아지를 쓰다듬는 것만 같은 애정 어린 그의 손길이 좋다.
그는 곧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 앞으로 나를 이끈다. 이제 그의 그림은 팰림세스트의 다양한 문구들이 기호학적인 의미를 부여하던 젊은 시절의 형태를 벗어나 더 깊은 차원의 추상이 되어 색만으로 도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필명으로 활동한 웹툰은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으며 밴드 활동으로도 노벨 평화상을 받은 밥 딜런 이후 또 하나의 쾌거를 이루어 냈다. 아버지와의 화해를 이룬 후 정신병원에 있던 엄마와도 자주 왕래하며 두 분의 임종을 지켜냈다. 삶의 파고를 이겨낸 그의 작품을 같이 바라본다. 어쩌면 그의 어깨가 떨리고 있는 것도 같다. 가만히 손을 내밀어 그의 굽어있는 새끼손가락을 붙든다. 서늘하게 전해지는 온기가 좋아 하나씩 손가락을 더해 잡아본다. 살아있다. 살아있기에 이렇게 만난다. 삶은 살아야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축제. 그를 보며 다시 한번 깨닫는다.
요란한 알람에 잠에서 깬다. 아! 꿈이었구나. 무슨 꿈을 이렇게 총천연색으로 생생하게 꿀 수 있는지. (앞부분만 읽고 진짜인 줄 아시는 분! 무조건 제가 죄송합니다!)
얼마 전 스스로에게 주는 생일 선물로 <장 미쉘 바스키아> 전시회를 예약했다. 전시회에 가기 전 그에 대해 여러 가지 조사를 하던 차였기에 이런 꿈을 꾸었던가 보다. 정말로 그가 살아있었다면, 지금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을까?
유려한 곡선으로 서울 시내 한복판에 불시착한 우주선과 같은 모습으로 엎드려 있는 도심 속 유쾌한 문화 공간에서 나는 잠시 쉼표를 찍는다. 박보검의 목소리가 담겨있는 오디오북을 애정하는 마음으로 재생시키고 8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불태우듯 쏟아낸 바스키아의 작품들을 마주한다.
꿈속 주인공 바스키아. 마돈나의 전 애인, 1200억 경매가를 갱신한 화가, 그래피티 화가에서 순수예술 화가로의 변신에 성공한 인물, 독보적인 스타일의 화가 등등 그를 수식하는 수많은 말들이 있다. 그중 약물중독으로 27살에 요절한 천재화가라는 말이 제일 아리다.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계산하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수액을 강요하지 않고 봄의 폭풍 속에서도 여름이 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신 있게 서 있는 것처럼 익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의 말처럼 '익어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무대에서 당당하게 서 있을 수 있었다면 그의 작품 세계는 지금 어떻게 변모해 있을까?
어릴 적 당한 교통사고로 비장을 절제할 정도의 큰 수술을 받고 병실에 오래 누워 있었던 바스키아에게 그의 엄마는 의대 해부학 수업에 사용되던 "그레이 아나토미"라는 책을 선물한다. 책 전체를 통독하며 인간의 신체에 대해 탐구하던 어린 소년은 훗날 자신만의 독특한 형상을 창조해 낸다. 해골과 왕관, 인간의 장기들이 단순화된 선과 문구들과 함께 강렬한 색채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다. 학교를 중퇴한 바스키아는 그때 같이 나왔던 친구와 함께 세이모라는 팀을 만들어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을 시작한다.
순수예술 작가로 전향한 뒤에는 휘트니 미술관에서 주최하는 행사에서 최연소 화가로 초대받을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영혼의 대부라 부를 정도로 각별했던 앤디워홀과의 만남 이후 그는 화단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중요 신예작가로 급부상했다. 화려한 유명세와 함께 그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우울과 불안, 사랑하는 이들과의 결별로 인한 상실감으로 결국 약물 중독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유작과도 같은 작품 <EXU, 1988>을 마주한다. 요루바 신화에서 경계의 신으로 삶과 죽음, 혼돈과 질서의 문턱을 관장한다는 신 에슈. 야누비스의 형상을 한 존재를 둘러싼 수많은 눈이 보인다. 고대 이집트의 상징인 우자트의 눈. 담배중독이라는 단어와 함께 그의 발치에 동그랗게 놓인 제물과도 같은 담배는 노예무역과 담배 농장에서 노동력을 끊임없이 착취당한 흑인들에 대한 제의 현장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간결하고 거친 선과 과감한 구도와 다양한 상징의 사용으로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문제들을 직시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 냈다. 삶과 죽음, 존재가 갖고 있는 불안과 동시에 존재가 만들어내는 힘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가 다양한 방법들로 그림 속에 녹아있다.
여러 개의 섹션들을 통해 그를 만난다. 그림 아래를 여러 번 서성이며 그가 숨겨놓은 기호를 해석한다. 그의 그림 중 하나인 엠블럼처럼 화면 뒤의 불이 들어오자 단순했던 그림이 전혀 새로운 그림이 되던 것처럼, 작품들은 빼곡하게 새겨둔 문구들이 겹치고 지워지며 더 많은 생각거리를 만들어 낸다.
어쩌면 바스키아는 화가이기 전에 작가이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수십 권이 넘는 그의 메모장과 같은 노트를 보며 다시금 생각한다.
그의 정체성에 대해서. 그의 살았던 삶과 그가 누리지 못한 삶에 대해서. 자신의 영웅들에게 왕관을 씌워 준 바스키아. 나는 오늘 그의 왕관을 받아 들고 그를 기린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신지훈 : 소년시절
https://youtu.be/qb5PysJFTKY?si=ZyrJ34FO_jhcel82
#바스키아
#DDP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