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
세로로 긴 화면에는 초록빛 잔상이 가득하다. 속도가 제법 빠른 탈 것 안에서 창 밖을 바라보는 어린 아이가 된 것만 같다. 올리브, 세이지 그린, 모스 그린, 라임, 제이드, 말라카이트. 빛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초록은 다양한 명도로 흩어져 쏟아져 내린다. 무슨 의미일까?
타이파 주택 박물관(Casas da Taipa) 내 전시장 및 노스탤지어 하우스 열리는 전시 중 황메이팅 (Wong Mei Teng)의 <8760초의 터널> 앞에 서 있다. 아시아의 화병이 길거리 시장에서 발견되어 기차로 운송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고 한다. 기차 창문은 빛과 기술에 의해 왜곡된 '존재하지 않는 스크린'이 되고, 신체의 이동은 매 초마다 의식의 층위가 겹쳐지는 색들로 담겨있다.
2019년작 영상 설치물로, 10분 13초 분량의 사운드 포함 HD 영상과 비닐 프린트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이 발길을 붙든다. 포르투칼의 식민지배를 오랜 시간 받아왔던 마카오. 반출된 유물이 얼마나 많을까? 화병에 새겨진 그림 속 어린 동자가 되어 창 밖을 바라보고 있는 상상을 하다 멀미가 인다.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소유물로 영원히 감춰져 빛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화병의 도착지는 어디였을까?
한쪽 구석에는 흰 빛의 보드라운 유선형의 비늘들이 회전하고 있다. 줄리아나 마츠무라 (Juliana Matsumura)의 <조상과의 열병 (Ancestral Fever)>이라 이름 붙은 설치미술품을 바라본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유무형의 유산을 다양한 크기의 플라스틱 판의 중첩으로 표현했다고 한다.
투명한 패널들이 켜켜히 꿰어진 수직의 구조로 과거와 현재를 잇는 영혼들의 연결이 엿보이는 독특한 작품이다. 내 유전자 안에는 어떤 흔적들이 남아있을까? 아빠의 기일이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구석에서 소리없는 오르골의 장식처럼 돌아가고 있던 작품 앞에서 난 오래 곰곰하며 서 있었다.
세상의 모든 호화로운 호텔들이 줄지어 서있는 대로를 뒤로 하고 숨어든 쿤하 거리 한 켠. 낮은 벽에 새겨진 이 곳의 시간을 눈에 담는다. 그 중 가장 아름다운 살아있는 증인. 나무를 바라본다. 인공의 빛이 닿지 않는 오래된 거리에는 대만고무나무라고 하는 반양나무들이 즐비하다.
서로 다른 굵기의 줄기들이 하나로 이어져 거대한 그늘을 만들고 있다. 그 사이 작고 가느다란 촉수들처럼 드리워진 공기 뿌리들이 인상적이다. 이것들이 공기 중의 습기를 빨아들인다. 처음에는 가느다란 실처럼 내려오지만, 일단 땅에 닿으면 굵어지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나면 원래 줄기만큼 굵어져서 거대한 나무를 지탱하는 또 다른 버팀목이 된다고 한다.
저마다 성장하는 과정이 다르기에 나무의 수형을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는 공중뿌리에 손을 내밀어 본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내는 버티고 선 세상의 주인이 되는 이 놀라운 생명의 힘. 몇 세기 동안 이 땅의 주인이 바뀌는 동안 이들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서사의 변화를 지켜보았을 나무에 닿고싶었다. 그들이 전해줄 이야기를 듣고싶었는지도.
발끝을 최대한 들다 어림없는 높이에서 웃고있는 녀석이 얄미워 벽의 난간을 따라 몸을 딛고 손을 더 뻗어본다. 어림없다. 에이와 여신과의 도킹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한 걸로. 풀쩍 난간에서 뛰어내렸다. 묵직하게 전해져오는 무릎뼈의 통증에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뿌린다. 중력에 철저하게 복종 중인 나이를 잊은 대가이다.
좁게 이어진 길을 따라 다시 걷는다.
* 같이 듣고 싶은 곡
Passenger : The Road is Long
https://youtu.be/oi4aTOc-IX4?si=aJUb11Q3eiQ4_uR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