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세계가 다른 이에게 자연스럽게 녹아들며 융화된 채로 소설은 끝을 맺습니다. 요 며칠 틈나는 대로 붙들고 있었던 책이죠. 무슨 이유로 부모로부터 버려졌는지 모를 끔찍한 흉터가 가득한 소년이 주인공이죠.
여러 곳의 고아원을 전전하며 살던 아이에게 하산이란 터키사람이 찾아와 산동네 후미진 골목으로 데려갑니다. 태어나자마자 세상의 존재들과 이별하는 법을 다른 것보다 먼저 배워 온 아이가 처음으로 세상에 녹아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죠.
성장소설을 읽다 보면 묵직한 성장통을 무사히 이겨낸 때의 기분을 다시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제게 '지금 넌 제법 사람의 형상을 입었으니 그쯤 하면 되었노라.'라고 누군가 이렇게 말하기 전의 저를, 작디작은 뿌리털의 저를 만나는 시간인 것만 같아서 한참 먹먹해지곤 합니다.
이덕영 : 방랑계단 2022
한국전쟁을 다룬 소설들을 보면, 우리나라 현대사가 보인다죠. 한동안 열심히 찾아 읽던 소설 속에선 사회적 분위기에 억눌린 인물들의 트라우마와 치유받지 못한 상처들로 인해 결국 생이 어긋나 버리는 경우들을 많이 만납니다.
우리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강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죠. 이보다 더 확실한 반공교육이 어딨을까요?
이덕영 : 노동과 물결 (2021)
하지만 한국전쟁 60주년을 훌쩍 넘긴 시기에 발표된 이 소설에서 작가는 "의붓"과 "흉터"란 단어를 통해 전쟁을 겪지 못한 세대가 겪은 세대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상처를 관찰하고, 자신의 세상에서 그 상처들의 흔적을 품어 안는 방법을 배우며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화해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터키인 하산은 이슬람교도이고 이맘이라는 그 구역의 종교지도자도 외우지 못하는 꾸란을 제대로 암송할 줄 아는 사람이죠. 하지만 전쟁 때 박격포에 조각난 동료들의 시신을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먹은 뒤로 자신의 종교를 등지고 그는 모스크가 아닌 자신의 집에서, 그것도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서 홀로 기도해요. 또 이슬람교가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팔죠. 손에 남은 흉터가 증명하는 그의 시간이 소년의 눈을 통해 세밀하게 전달됩니다.
그리스인 야모스는 터키와 앙숙관계라며 하산을 늘 약 올리는데 열을 올리는 인물이죠. 안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충남식당에 들러 눈치 봐서 밥을 얻어먹으면서요. 유창한 말솜씨로 소년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넉살 좋게 안나 아주머니에게도 너스레를 떨면서 미운털 안 박히고 근근이 살아갑니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이유는 그리스 내전 때 폭격기로 자신의 사촌을 적으로 오인해 사살해 버린 충격 때문이었죠. 며칠씩 날품으로 일을 하느라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피골이 상접해 돌아오는 아모스. 그가 만나는 한국은 어떤 얼굴이었으며, 어떤 장소였을까요?
야모스에게 대지의 여신 가이아라 불리며, 어린 소년에게 따뜻한 품과 사랑, 그리고 신비한 치유능력을 보여주는 여인 안나 아주머니는 남편의 폭력을 피해 도망 나와 식당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팔도의 이름을 딴 음식을 해오며 식당 이름도 매번 바꿨는데, 충남식당이 제일 벌이가 좋다며 그 이름으로 골목을 평정하고 있죠. 골목마다 눈에 자주 띄는 숙이네식당만큼 친근한 이름입니다.
(깨알 홍보 중. 우리 엄마 식당이름)
또 허구한 날 군가를 불러대는 대머리 아저씨, 그 아저씨와 우연한 기회에 한편이 되어 동네의 새로운 합성명사로 등극한 맹랑한 녀석이 있죠. '곧 죽을 텐데'란 말로 모든 실망과 분노를 잠재워보려고 하지만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가 운명의 장난이며 다시 환생해 제대로 살기 위해 이 세계에 잠시 머물 뿐이라는 맹랑한 녀석. 이 독특한 인물들의 케미스트리가 읽는 사람 앉은 채로 뒤로 넘어가게 만들죠.
이덕영 : 두 기둥(2021)
그리고 유정이란 말 더듬는 친구가 있습니다. 동물의 언어를 알아듣는다고 하는 이 아이가 특유의 분절법으로 말을 합니다. 소년은 유정의 말이 분수대에서 쏟아져 나오는 영롱한 물방울 같다고 기록하죠.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보석. 하지만 가정폭력으로 학대받던 유정의 엄마가 결국 집을 나가며 홀로 남겨지게 된 유정의 방황도 아프게 남아버립니다. 대략적인 인물특징만 이렇게 나열해도 마음이 씀벅 베어져 나갈 준비를 하고 이 책을 읽어야만 할 것 같아 겁나시죠?
이덕영 : 낯선 경계
책 출간 인터뷰를 찾아보니
"전쟁이라는 것도 인류역사의 타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절대적으로 타락시킬 수 없는 거죠. 하산 아저씨가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팔고 있지만 인간 자체가 타락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란 작가의 인터뷰 내용이 보이더군요.
내면의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겠죠. 그걸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가야 되는지를 작가는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제시하고 있습니다. 적응과 부적응의 이분법적 잣대가 아닌, 포용과 스며듦이란 새로운 생존의 방법으로 우리 사회의 <의붓>이라 불리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인물들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이덕영 : 검은 방
섬세하게 조각된 언어로 삶에 대한 깊고 진지한 통찰이 차분히 전해지는 소설입니다. 어려운 말로 소설 속 세상을 설계하고 인물들에 특이한 조건을 걸어 억지로 다른 이들과 차별화시키지 않아 더 좋았어요. 좋은 글은 읽는 동안 활자로 설계된 작가의 세상이 제 눈앞에 펼쳐질 수 있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주입시키려 하는 글이 아닌, 그 상황 속에 내가 관찰자가 되어 그대로 용해된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소설. 부분 부분 여러 번 다시 읽게 되는 문장들도 좋았고요.
연일 내리는 비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The Crisis'와 함께 화음을 이루는 날입니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에 나오는 곡이죠. 중간중간 들어간 불안정한 음들이 모여 전체 곡으로 이어져요.
잘못 누른 건반처럼 살짝씩 튀어 오르는 음들이 끝내는 하나의 아름다운 곡을 완성시키듯, 저들의 삶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와 오늘은 같이 듣고 싶은 곡으로 이 곡을 골랐습니다. 어떠셨나요?
** 덧붙이는 말
명절이라고 흥성거리는 분위기 속 소외되거나 마음 다치는 사람 없이 행복한 시간들로 이 연휴가 지나가면 좋겠습니다. 첨부한 사진들은 현재 대전시립미술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청년작가 지원프로젝트에 참가한 이덕영 작가의 펜화입니다. 기회 되시는 분들은 가보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10월 1일까지 진행 중인 이건희 컬렉션만큼이나 뜻깊은 작품들이 많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