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가 쌓여가며 윤곽이 선명해지던 어느 시점부터 스스로가 변형되는 걸 느꼈어. 인간이 인간에게 어떤 일을 저지른다 해도 더 이상 놀라지 않을 것 같은 상태...... 심장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이미 떨어져 나갔으며, 움푹 파인 그 자리를 적시고 나온 피는 더 이상 붉지도, 힘차게 뿜어지지도 않으며, 너덜너덜한 절단면에서는 오직 단념만이 멈춰줄 통증이 깜박이는......
그게 엄마가 다녀온 곳이란 걸 나는 알았어. 악몽에서 깨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면, 그 얼굴에 끈질기게 새겨져 있던 무엇인가가가 내 얼굴에서도 배어 나오고 있었으니까. 믿을 수 없는 건 날마다 햇빛이 돌아온다는 거였어. 꿈의 잔상 속에 숲으로 걸어 나가면, 잔혹할 만큼 아름다운 빛이 나뭇잎들 사이로 파고들며 수천수만의 빛점을 만들고 있었어. 뼈들의 형상이 그 동그라미들 위로 어른거렸어. 활주로 아래 구덩이 속에서 무릎을 구부린 키 작은 사람을, 그 사람뿐 아니라 그 곁에 누운 모든 사람들이 살과 얼굴을 입는 환영을 그 빛 속에서 봤어. 흑백이 아니라 선혈로 얼룩진 옷을 입고 그 구덩이 속에, 방금까지 살아 있었던 부드러운 어깨와 팔과 다리로.
내 인생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더 이상 알 수 없게 되었어. 오랫동안 애써야 가까스로 기억할 수 있었어. 그때마다 물었어. 어디로 떠내려가고 있는지. 이제 내가 누군지.
- 작별하지 않는다, p. 316-317. 한강 저. 문학동네
지극한 사랑의 감정을 언제 느끼나요? 며칠 열감기로 퀭해진 눈으로 저를 보다 의심 없이 와락 안겨들어 고개를 기대는 조카의 솜털 같은 머릿결을 쓰다듬을 때, 가슴 한쪽이 뻐근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가장 여리고 아직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존재가 나를 믿고 기대올 때, 무엇이든 다 해줄 수 있겠노라 다짐하게 되는 그때. 달려가 안고 싶은 존재가 있을 때 우리는 강해지지 않을까요?
여기 한 여인이 있습니다. 원고를 탈고한 뒤 극심한 기력상실로 외출도 하지 않고 위경련과 편두통으로 남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고통의 극점을 매일같이 느끼는 사람이죠. 그녀에게 오래전 함께 했던 친구가 연락을 합니다. 지금은 제주에서 목공일을 하고 있는 친구인데 전기톱에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하고 서울로 왔다는 비보를 전하죠.
친구의 연락을 받고 병원에 간 그녀는 삼분마다 한 번씩 수술 부위를 주삿바늘로 간병인이 찔러 억지로 피가 흐르게 하는 장면을 보게 됩니다. 창밖에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고통을 감내하고 있던 친구는 주인공 경하에게 제주 자신의 집에 두고 온 새들 아마와 아미를 돌봐달란 부탁을 합니다. 친구가 이겨내고 있는 고통을 목도한 주인공은 거절을 하지 못하고 덜컥 폭설이 내리는 제주도로 가게 되었죠.
주인공은 친구의 집으로 향하는 길에서 잊고 있던 오래전 꿈을 상기하게 됩니다.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 잊힌 봉분. 캐내지 못한 백골들이 밀려오는 바닷물에 흐트러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울부짖던 자신의 모습. 잊고 있던 오래된 꿈을 복기하다 지금이 자신이 4년 전 탈고한 소설에 대한 꿈이 아닌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임을 직감하게 되고, 그녀는 친구와 친구의 가족, 그리고 제주에 묻힌 오래전 진실을 마주하게 됩니다.맞습니다. 작가 한강이 그려낸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 속 여러 가지 이미지들 중 눈 내리는 장면이 인상적으로 등장합니다. 수증기를 타고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과 두 개의 물분자가 결합해 눈의 첫 결정이 만들어질 때 눈송이의 핵이 탄생합니다. 우리가 과학잡지나 접사사진에서 접한 한없이 투명한 크리스털 같은 눈 입자는 반드시 이 재를 갖고 있어야 눈송이가 되고 결빙이 된 채로 한 시간 남짓한 하강시간을 견뎌 땅으로 내려오죠. 수많은 결속으로 커진 눈입자들의 무한한 가지들이 주변의 소음조차 가두어버릴 정도로 고요히 날개가 되어 이 땅에 내려와 모든 걸 덮어버리고 1년에 한 번 동토 아래 생명들이 깨끗하게 세례식을 받게 만듭니다.
그런 눈이 폭설로 변해 내려 덮는 제주에서 주인공은 사투를 벌입니다. 평소 앓고 있던 편두통과 위경련으로 인해 여러 번 넘어지고 구르면서 친구가 부탁한 새들의 생사를 위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곳을 뚫고 가죠. 넘어지고 찢기고, 잃어버리고, 의식을 잃었다 깨며 마침내 도달한, 도달했다 믿는 공간에서 그녀는 기이한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묻었던 새가 되살아나 새장 밖을 날아다니고, 병실에 누워있던 친구는 폭설로 전기까지 끊겨버린 집에서 멀쩡히 돌아다니며 자신이 그간 모아 왔던 "제주 4.3 사건"과 관련한 자료들을 주인공에게 보여줍니다. 고통의 극점을 경험한 이들만이 진실에 마주 설 자격을 얻을 수 있다는 걸 말하는 걸까요? 마침내 인선이 모아놓은 이 섬의 이야기 앞에 귀를 기울이게 된 주인공을 통해 제3부의 막이 열립니다. 그 섬의 잊힌 사람과 시간들을 마주하게 되는 비밀의 문에 우리 또한 서게 되죠.
작가의 설정은 놀랍도록 정교하고 은유적입니다. 죽음의 위기에 놓인 두 존재인 주인공 경하(소설가)와 인선(목공예가, 독립영화감독)을 배치하고 그녀들이 나누는 대화들 곳곳에 깔아놓은 복선들과 동선을 따라 1948년 4월 3일 이후 제주에서 일어났던 일들과 그로 인해 영원히 역사 속에 묻혀버린 아직도 발견되지 않은 이들의 비극을 우리가 직시하게 만들고 있죠.
그중 계속 반복된 눈 내리는 이미지와 연니[軟泥]라는 바닷속 부유물이 깊은 바닷속 수압의 극점을 지나 내려앉는 이미지들을 꽃비가 날리는 것처럼 표현한 부분들이 전체 서술의 얼개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바닷가로 끌려 온 수많은 민간인들이 무차별한 총격으로 살해당하고, 그들을 바다에 던져버렸다죠. 해류를 따라 어떤 시신은 쓰시마섬까지 밀려가 발견되고, 그 외 대다수는 이렇게 바닷속에 수장이 되어 연니[軟泥]가 되어 지금도 떠돌고 있음을 은유하는 것 같았습니다.
주인공 인선의 엄마가 어린 날 엄마의 심부름으로 외가댁에 갔다가 마을에 닥친 화를 피하고 학교 운동장에 끌려가 살해당한 마을 사람들 시신들 중에 가족들을 찾는 장면이 나옵니다. 끝내 찾지 못한 여동생을 찾다 집에 오던 중, 턱에 총을 맞고 피를 흘리고 엎어져있는 동생을 발견하죠. 피를 많이 흘린 동생을 위해 자신의 손을 깨물어 동생의 입에 넣어주죠. 옴쭉 대며 피를 빨아먹는 동생을 보며 반드시 살려야겠다 다짐하는 인선의 엄마. 치매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중에도 한 번씩 잠든 인선의 입에 손가락을 밀어 넣는 그녀의 세월을 보며 저는 "잠들지 않는 남도"란 노래를 떠올렸습니다. 이산하 시인의 한라산을 찾다가 알게 된 노래죠.
그 뒤 성인이 된 인선의 엄마는 육지로 이송된 오빠를 찾아 대구 경산과 제주를 오가며 유가족 협의회를 통해 진상규명을 위한 활동을 활발히 하죠. 1960년 대구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서 발견된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들의 유해가 대규모 발견된 이후, 그녀의 활동이 정지되어 버립니다. 34년, 군부가 물러나고 민간인이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인선엄마의 시간은 그렇게 정지되어 사라진 가족들, 사라진 집터, 정지된 삶을 허깨비처럼 살아갑니다. 그리고 치매 걸린 노인이 되어서는 인선에게 매달려 밤이면 문간을 기어와 인선의 입에 자신의 손가락을 밀어 넣고 살리지 못한 가족들을 혼자 추모하죠. 끝없는 어둠 속에서.
책을 다 읽은 뒤 한참을 먹먹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해 정신없이 관련 자료들을 검색하고, 읽고 또 읽었습니다. "순이삼촌"이란 소설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토록 잔인하게 절멸을 위해 행한 살육이 존재했었다는 걸 제대로 직시한 시간이었습니다. 투명하고 아름다운 문장이 만든 정교한 얼개 속에 부유하는, 역사적 사실과 남겨진 이들의 목소리들을 보고 느꼈습니다. 그 소리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는 이들을 위로하고 포용하는 파도소리가 되어 얼개 안에 찰방거립니다.
소설 속 경하와 인선이 장자못 설화에 등장하는 돌이 된 여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죠. 시아버지가 쫓아낸 노승에게 몰래 시주를 한 덕분에 난리를 피할 기회가 주어졌던 여인. 절대 뒤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어겨 돌이 된 여인을 이야기하며, 그녀가 돌아본 이유가 무엇인지를 서로 묻는 장면이죠.
그것이 어쩌면 이 소설에 대한 답일지도 모릅니다. 현재의 삶 속 자신의 심장이 돌로 굳어가는데도 그들이 그날을 되짚어 보는 이유,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이 소설을 읽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