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s OK.

by Bono







이 아파트에 모인 사람들에게는 모두 저마다 콤플렉스와 번민과 불안이 있었다. 로게르는 상처받았고 안나레나는 집에 가고 싶었고 레나르트는 토끼 탈을 벗을 수가 없었고 율리아는 피곤했고 로는 걱정스러웠고 사라는 고통스러웠고 그리고 에스텔은…… 음…… 아직 아무도 에스텔이 어떤 사람인지 몰랐다. 어쩌면 그녀 자신조차 잘 몰랐다. 가끔 ‘스톡홀름 출신’이라는 것이 칭찬일 때도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는 좀 더 넓은 곳. 갈망하지만 감히 저지를 수 없는 어떤 일. 아파트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기만의 사연과 씨름하고 있었다.

- 불안한 사람들 | 프레드릭 배크만, 이은선 저










우리의 마음속엔 바닥짐이 필요합니다.




큰 풍랑이 일어서 배가 요동치더라도 무게중심이 잡혀야 뒤집히지 않기에, 배에는 늘 균형을 잡기 위해서 배 밑바닥에 항상 바닥짐을 싣는다고 합니다. 배의 규격과 중량에 맞춰 짐들의 크기는 저마다 다르게 채워지겠죠. 그런 뒤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출항하는 수많은 배들이 매일 마음의 중심추를 정비하고 일상의 바다를 향해 나가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항구를 오가는 배들을 어린 날 늘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서 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사는 곳이 보령이라 조금만 달려가면 대천항이 나오는데 두 개의 등대 사이로 두 배가 교차하는 순간들을 참 좋아하거든요. 나가는 배와 들어오는 배의 힘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하는 교차는 때론 교향악처럼 질서 정연하고 단정하기까지 합니다. 멀리서 보면 배는 흔들림 하나 없이 당당하고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고 나가요. 선미가 일으키는 하얀 포말이 축배를 위해 따른 샴페인 거품처럼 보일 때도 있니다.



제 마음의 바닥짐을 예기치 못한 사고로 쏟아버리고 일상의 균형을 잡지 못하고 허덕이고 있던 날이 있었습니다. 그때 프레드릭 베크만의 신작 <불안한 사람들>을 손에 잡았죠. 알록달록 책 표지부터 언제나 맘에 드는 그의 작품들은 처음 우리나라에 발간되었을 때부터 한 권도 빼놓지 않고 사서 읽고 있습니다. 시니컬한 유머도, 다양한 군상들의 소란한 대화도, 인물들의 내면에 숨겨진 이야기들이 일상과 얽혀 또 다른 이야기들로 번져나가는 방식도 참 좋습니다.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서늘해졌던 손가락 끝에 피가 도는 것처럼 저릿하게 가슴이 뛰는 기분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 소설도 그더군요.







6500 크로나(한화로 약 85만 원)의 월세를 내기 위해 은행강도가 된 사람이 아파트 오픈 하우스에 뛰어듭니다. 누가 봐도 가짜로 보이는 권총(실은 진짜였죠!)을 손에 들고 계단을 뛰어올라오느라 스키마스크가 돌아가 한쪽 눈만 보이는 범인은 아파트 오픈하우스 안에 있던 인질 같지 않은 꺾이지 않은 불굴의 영혼들로 자신의 결점을 감싸 안고 살아가던 이들에게 둘러싸이죠. 초반 인질극 상황이 끝나고 인질이었던 이들을 심문하면서 글이 시작되던 때에는 살짝 산만해서 소설에 집중을 못하겠더라고요.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엉뚱한 대화글들을 따라 읽는 게 어려웠거든요.



범인에 대한 정보를 독자에게 말해주기보다 자신들이 겪은 황당한 일에 대한 불만과 자신의 삶에 대한 불확실성등을 쏟아내죠. 이야기하던 등장인물들의 단편적인 말들은 책장을 넘기면서 퍼즐조각처럼 하나하나 맞춰져 그림이 되어니다.


유머가 인생의 최후의 방어선이라 여기는 부모님 아래서 자란 로는 시답잖은 농담을 해대죠. 하지만 내면엔 아버지 없이는 달걀 하나 고르지 못하는 유약한 아이가 있고, 그런 아이가 자신의 부인인 율리아가 아이를 낳기 전에 아파트를 골라야 하고, 모든 선택의 온전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율리아는 호르몬 불균형으로 인해 엄청난 쌈닭이 되어 보는 사람마다 물어뜯을 기세로 늘 손을 원피스 앞주머니에 장전 중이고요.


다리 아래로 뛰어내려 자살을 한 남자에게서 받은 편지를 핸드백 맨 아래 넣어두고 다니면서 십여 년 넘게 자신에게 배달된 편지를 개봉해보지 못하는 여인 사라도 있습니다. 그녀는 심리상담을 받으며 집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로 볼륨을 높이고 데스메탈을 듣죠.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을 떨쳐내려 노력을 하고 있는데 은행 대출계의 최고참인 그녀가 정말 논리로는 누구도 대적할 수 없게 세상을 꼬집는 말들이 통쾌해서 좋았습니다. 고슴도치 같던 그녀가 세상으로 천천히 발을 딛는 순간 그래서 더 사랑스럽게 다가오는가 봅니다.


선임 애널리스트로 승승장구하다 퇴직한 안나레나와 그런 아내를 위해서 자신의 일을 포기하고 육아에 매진한 로게르 부부는 아파트를 싼 가격에 사서 인테리어 시공 등을 마치고 비싼 값에 파는 걸 주로 하며 퇴직 후 생활을 누리고 있죠. 불이 꺼진 후에야 서로를 만질 수 있는 흔히 말하는 애정표현조차 낯설어진 부부지만, 서로를 위해 보여주는 엇박자의 배려들은 지금의 60대 부부들이 격하게 공감하실 만한 모습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정신없이 살아오다 드디어 그들을 떠나보내고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며 이야기할 시간을 갖게 되었지만 상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 기본적인 것들조차 낯설어진 분들을 위로해 주는 인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과 사별하고, 아직 그가 살아있으며 자신을 위해 저기 건물 밖에서 주차를 하느라 늦게 온다고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할머니 에스텔. 책을 좋아하던 옆집 남자와 서로 좋아하는 책을 권하고 나눠보면서 영혼의 교류를 했다는 사랑스러운 이 분. 서로가 맘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책장을 살짝 접거나 아니면, 구절 옆에 감상을 써놓거나 하면서 책에 대한 감상들을 나누죠. 제 로망이 깊게 이입되 버린 캐릭터입니다. (저도 이렇게 해보고 싶단 말이죠.)


목사였던 아내와 사별하고, 아직도 결혼반지를 끼고 다니는 짐.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려던 소녀를 구한 뒤 경찰이 된 아들 야크와 함께 코딱지 만한 동네 경찰서를 지키고 있죠. 그들의 영혼을 죽어서도 보살피는 여인이 한 말이 인상적입니다.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구하는 엄마가 다쳐 병원에 있게 되자 화가 난 아들 야크가 왜 가족들 생각은 하지 않느냐며 전화로 다친 엄마에게 성을 내자 그녀는 이렇게 말하죠.




그녀는 지구 반대편의 병원에 앉아 있었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아들이 느끼는 바닥 모를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칼에 맞지 않게 하느님이 보호해주지는 않으시지. 그래서 하느님이 다른 사람들을 주신 거야, 서로 보호하면서 살 수 있게."












어쩌면 이 말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만들어 낸 선의의 원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동그랗게 은행강도를 둘러싸고 자신들 안에 있는 상처들을 하나씩 꺼내 보이며 그를 설득해 전혀 다른 방향의 삶의 기회를 갖게 만들어 주는 것. 동화 같은 이야기라 생각이 드시쥬? 지하철 안에서 핸드폰을 하다 우연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타인의 눈빛에 흠칫 놀라는 요즘의 현대인들에게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요.











어쩌면 우리 안의 모든 불안은 사랑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누구보다 자신에게 어진 삶을 사랑하기에 내 삶에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변수들이 불안하며, 또한 나를 둘러싼 가족들을 사랑하니까 그들이 보이는 모습들에 더 예민한 반응들을 보일 수밖에 없겠지요. 무관심으로 대응하기엔 내게 너무나 소중한 이들이니까요. 놓쳐버린 화해의 기회도,

우리에게 다시 오지 않을 지난 시간들에 대한 후회들도 사랑하기에 내가 느끼는 감정들이기에 그 모든 불안들까지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삶이 온전해진다는 걸 소설을 통해 깨닫습니다. 그리고 모든 순간들이 연결고리가 되어 우리를 지탱하는 인다라의 구슬이 되어준다는 것도요.








우리는 스스로의 불안을 통해 성숙해집니다. 평상시 할 수 없는 깊은 사고로 내 말과 행동을 되돌아보고, 가장 예민하게 날 선 감각들로 일상에서 무뎌져 가는 존재의 소중함을 되새겨 볼 수 있는 시간이 우리에게 꼭 나쁜 것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불안들이 내일을 향해 출항하는 나라는 배의 바닥짐이 되고 있겠지요. 이런 마음을 다독이며 노래하는 가수의 노래도 들고 왔습니다. 아메리카 갓 탤런트에서 골든부저를 받은 제인 마르크제프스키의 노래죠.


"It's ok"
온몸에 퍼진 암세포로 생존율이 2퍼센트밖에 되지 않는 그녀가 인터뷰에서 이야기해요. 0퍼센트가 아니라고요. 2퍼센트는 무언가 일어날 수 있는 확률이랍니다. 아주 먼 데서 반짝이는 불빛처럼 희미한 생의 지수를 보고도 그녀처럼 밝게 미소 지으며 이야기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 출렁대는 마음의 바닥짐을 다독여 봅니다.












제인 마르크제프스키 - It's Ok

https://youtu.be/ehA_3AgT8HE




#불안한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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