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진실을 말해줘요. 난 알고 싶어요. 정직해줘요. 신이 더 이상 있든 없든, 그리고 그분이 지금 이 순간 당신에게 정직에 대해서 뭐라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녀를 당신이 납치했나요?
아뇨. 난 그러지 않았어요.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말했다.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있는지 알고 싶죠? 나 자신을, 내 모습을 어쩔 수 없기 때문에 여기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 그렇게 다르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는 바위처럼 하얗게 반들거리는 소나무에 기대어 힘없이 앉아 있었다. 다리의 살에는 구멍들이 생기고 색색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는 뭔가 무섭게 떨면서 내 눈을 보지 않으려 했다.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92세가 되도록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 이상 누구에게 연민을 느낀 적은 없었다고 여러분에게 말하고 싶다. 많은 독자가 그런 남자에게 연민을 품었다고 나를 비도덕적 늙은 마녀로 간주할 게 분명하다.
그러나 여러분 대부분은, 인생의 종말을 경험하고도 안간힘을 쓰며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 보니 그곳의 거주자들과 그들이 창조해 온 모든 것이 하찮고 우스꽝스럽고 신경 쓸 가치가 없거나 인과응보를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도 그냥 계속 살게 된 적이 없을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을 겪고 나서 살아보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내가 제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다만 여기 적으려는 것은 도덕성이 선함의 닻이 될 수 없고 인간은 우리 모두의 편의를 위해 한 가지로만 규정되기엔 너무 많은 면을 가진 존재임을 내가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 남자가 어떤 사람이었든, 그 점에 대해서는 그가 옳았다.
ㅡ 클로리스 | 라이 커티스, 이수영옮김
여기 72살의 여인 클로리스가 있습니다. 남편과 함께 깊은 산중의 국립공원에서 휴가를 보내기 위해 작은 경비행기를 전세를 냈죠. 평생 목축일을 하며 아내 몰래 절절한 연애편지를 써댔던 남편 윌드립씨가 튕겨져 나가 걸쳐진 나무 위에서 죽어버려 그대로 이별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요. 비행기 추락으로 오지에 홀로 남겨지게 되었지만 남편의 신발에 물을 담아 마시고 정체 모를 식물을 먹으며 생존을 위해 노력하죠. 후에 의사의 진단에 따르면 편모충에 감염되어 생사를 오갈 때 자신 앞에 나타난 정체 모를 마스크맨의 도움으로 강을 따라 인간 세상을 향해 계속 전진하는 그녀의 이야기가 책의 서문을 엽니다.
이야기는 그녀가 약 3개월 만에 무사히 구출되어 20년 뒤 요양병원에서 당시의 일을 회고하며 진행되죠. 그런데 여기엔 또 다른 화자 루이스가 등장합니다. 모두가 포기한 클로리스의 구출을 위한 탐색을 진행하던 여인이죠. 다른 이들이 이미 클로리스가 야생동물의 한 끼가 되었을 거란 지극히 현실적인 진단을 내릴 때 루이스는 무전에서 들은 이름, 클로리스를 기억하며 추적을 강행하죠.
37살의 루이스는 11년째 산림 경비대원으로 일하는 중인데 남편의 이중혼으로 상처를 받고 인간세상의 많은 것들에 상당히 회의적인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이죠. '닥터 하우'라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며 세상을 살아가는 처세와 사람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자신만의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한걸음 나갔다 싶으면 다시 자기 안의 동굴로 숨어버려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어요. 게다가 입은 얼마나 거친지 몰라요. 한 번씩 포문 열듯 쏟아지는 욕들과 냉소적인 말투들을 보면 가시 가득 돋친 고슴도치가 생각이 나더군요.
한 여인은 생존을 위해, 한 여인은 마음의 길을 찾기 위한 여정이 그려집니다. 그런 여인들 옆에 다양한 인물군들이 등장하는데, 클로리스를 돕는 마스크맨 벤자민 머베크는 12살 소녀의 실종사건과 관련해 FBI의 추적을 받고 있는 인물인데 어찌 된 일인지 위험에 처한 클로리스를 도우며 스스로 그녀 앞에 모습을 나타내죠. 내내 산중 깊숙한 곳에서 꽁꽁 숨어 살던 그가 말이죠. 그리고 그에 대한 서술을 통해 클로리스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과 판단들의 선악, 도덕적 기준들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우리의 판단을 요구하죠.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에 지금도 저는 곰곰 중입니다.
그리고 루이스 옆에는 아내와 사별한 블루어란 남자가 계절학기 봉사활동으로 산림 경비대 활동을 신청한 딸과 함께 나타나요. 루이스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만들어놓은 견고한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백묵가루를 손에 바르며 자신의 정신상태를 컨트롤하는 사람이죠. 그리고 정상인들보다 더 느린 발달상태를 보인다는 블루어의 딸 질이 있죠. 루이스는 자신을 사랑하는 블루어보다 그의 딸 질에게 더 끌립니다. 이 감정에 대해서는 쉽게 서술하지 못하겠어요. (갑자기 화살촉을 잃어버린 사랑의 작대기에 저도 살짝 어지러워요.)
자, 여기까지만 들으면 이 무슨 현대판 로빈슨 크루소 막장 드라마인가 싶으시죠? 시작은 단순했어요. 갑작스러운 할머니의 조난, 그리고 그녀를 찾는 이들. 무사히 해피엔딩으로 구조된 후 20년이 지나 회고록을 쓰는 할머니. 루지 총을 든 할머니처럼 씩씩하고 용맹한 여인을 상상하며 유쾌하게 읽고 넘길 책으로 손에 쥔 건데 이런이런 그만 머릿속이 복잡해졌어라. 인물 사이의 관계와 그들의 가치관들을 접하면서 말이죠.
글 초입부 클로리스가 한 말이 있습니다.
나는 더 이상 남자든 여자든 함부로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일 뿐, 그 문제에 대해 많은 말이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삶의 황혼기에 마주하게 사건을 통해 신이 의도하지 인생의 길을 만난 그녀가 70살 가까이 쌓아 온 자신의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갖는 것이 좋을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어요. 단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등장인물들이 있어서 무조건 읽어보시라 권하지는 않겠어요. 읽고 난 후 인물들의 행동과 말을 아직 저도 내내 분석 중입니다. 판단중지 상태로요.
뉴스를 통해 불특정 다수가 한 사람을 향해 쏘아 올리는 증오의 화살을 보았더랬죠. '페미냐, 아니냐'에서부터 다양한 논쟁거리들이 소란스레 끓고 있어요. 나라와 나라, 인종과 인종 사이 여러가지 오래 이어져 온 반목도 봅니다. 증오의 화살을 쏘는 건 쉬운 일이죠. 대상과 목적이 분명하니까요. 하지만 그 화살이 정당한 이유로 쏘아졌는지를 묻는다면 어느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들의 좁은 식견으로 바라보는 세상에 대한 퓨즈, 에포케(epoche)가 필요한 순간도 있습니다. 사건이나 존재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다면 때로는 판단중지가 필요하죠. 어설픈 판단으로 함부로 돌을 던지는 이들을 바라보니 소설 속 주인공 클로리스가 떠올랐습니다. 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자신의 시간을 들여다보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나직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소란한 세상문을 닫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바라보는 중입니다. 만화경 속 요지경 세상을요. 저기 사진 속 토토로처럼 멍한 표정으로요. 같이 멍해지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