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달에 기대다

by Bono











마음이 캐틀그리드 위를 걷는 한 마리 소가 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구덩이를 파고 격자망을 덮어 탈 것은 지나갈 수 있지만 가축은 지나가지 못하게 만든 땅 위에서 앞으로 가야 하지만, 어디를 딛어야 안전할지 몰라 주춤거리며 서 있는 기분.


바쁜 일상을 보내고, 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지워가며 잘 달성했다고 생각하지만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날이면 울타리 밖으로 탈주를 시도하는 한 마리 소가 된 기분으로 일상의 경계에 서 있게 된다. 정작 눈앞의 캐틀그리드에 놀라 뛰어나가지는 못하면서 콧김을 내뿜으며 발로 쿵쿵 땅을 울리고 선 소를 떠올려 보라. 두 눈은 크게 뜨고 터럭까지 모두 삐죽 솟아올라 콧김이 나오는. (음... 상상하니 좀 숭허네... 버펄로 들소 떼가 생각이 나는 건 또 왜인지. 동물의 왕국을 그만 봐야겠군)












가방 모퉁이에서 삐죽 고개를 내민 책, 클레이 키건의 <맡겨진 소녀>의 접힌 종이 모서리가 보인다. 책을 펼치면 예고도 없이 한없이 목가적인 풍경 안에 어린 소녀가 톡, 빗방울처럼 떨어진다. 튀어 오른 물방울이 맞닿은 곳에는 오래된 고목처럼 서 있는 두 부부가 있고 이들은 자신들을 찾아온 소녀로 인해 오랜만에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어떤 훈계나 잔소리 없이 넉넉하게 팔을 벌려준다. 갑작스레 삶의 바운더리가 바뀌어 허둥대고 눈치를 보던 소녀는 그들의 넉넉한 품에 동화되어 간다. 읽다가 접어둔 책 속에 이런 글이 나온다.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아저씨는 내가 발을 맞춰 걸을 수 있도록 보폭을 줄인다. 나는 작은 주택에 사는 아주머니를, 그 여자가 어떻게 걷고 어떻게 말했는지를 생각하다가 사람들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다.


교차로에 도착하자 우리는 오른쪽으로 꺾어서 가파르게 경사진 내리막길을 따라 걸어 내려간다. 나무에 거세고 요란한 바람이 불어 마른 가지들을 갈라놓고, 나뭇잎을 일으켜 세워 흔든다. 이 길이 끝나면 바다가 나온다는 사실을 아는 채로 발밑의 길이 점점 낮아지는 것을 느끼니 기분이 좋다. 길은 계속 이어지고 하늘이, 모든 것이 더 환해지는 느낌이다. 킨셀라 아저씨는 별 뜻 없는 말을 몇 마디 하더니 늘 그렇듯 조용해지고,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 흘러서 우리는 차를 세워두는 드넓은 모래밭에 도착한다.


- <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다산책방 p.69-70







임신한 엄마의 출산을 앞두고, 먼 친척집에 맡겨진 소녀가 이곳에서 가족이란 것이 무엇인지. 정말로 내가 닮고 싶은 어른이 누구인지, 살면서 말을 해야 할 때와 침묵해야 할 때를 배워가는 모든 순간들이 하나하나 파스텔처럼 그려지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킨셀라 아저씨댁의 죽은 아들의 옷을 접어 입으며 그곳 생활에 적응하던 소녀는 수다스러운 동네 여자에게서 이들 부부의 아픔을 듣게 되고, 용서라는 이름으로 아픔을 다독이는 부부의 마음을 헤아리며 가만히 침묵하며 내면의 성장을 한다.


사람이 사람에게 무언가를 억지로 주입하며 가르치려는 것이 아닌, 그저 옆에 있어줌으로써 기댈 곳을 내어주고 품어주는 것으로 어떻게 다른 이의 내면을 성장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성장소설, 내가 접어 둔 한편을 다시 읽어 내려간다.










책 귀퉁이 날 선 곳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다. 분홍빛 물이 번지며 손톱달이 또렷해진다. 이제 내가 딛고 선 땅이 캐틀그리드가 아니라 내가 다져놓고 쌓아 올리고 있는 귀한 터전으로 돌아온다. 군데군데 얼룩져 보이던 검은 구멍들이 메워지고 초록의 생기가 보인다. 우리 밖 탈출을 꿈꾸던 마음을 달래고 깊은 밤에 기대는 시간, 다시 숨을 쉰다. 달에 맡겨진 소녀가 되어.







* 듣고 싶은 노래 - 짙은,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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