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이름 짓는 단어들은?

by Bono





파주 출판단지에 가면 안중근 의사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그곳을 계획하고 만든 이기웅 이사장이 일을 하며 힘들 때마다 안중근 의사에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속에서 안중근 의사가 나타나

" 그 일을 꼭 해야 하느냐? 그 일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간절한 목소리로 그렇다 대답을 했다고 한다. 그 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고 지금의 파주 출판단지가 만들어져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문화예술명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日日不讀書 口中生荊棘)'란 안 의사의 유묵 정신에 따라 세웠기에 그의 흉상을 만들고 이곳의 수호성인으로 모셨다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실제로 이곳을 방문했을 때 그 흉상을 찾아보기도 했다.



처형 후 3일 동안 시신 인도를 하지 않은 일제의 만행으로 어디에 묻혔는지도 모르는 데다가 사후 100년이 지나 이제는 DNA조사로도 확인조차 불가능하다는 안의사의 유해. 우리가 마음속으로만 그리워하게 된 이를 기리며 쓴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을 읽었다.








...... 도마야, 악으로 악을 무찌른 자리에는 악이 남는다. 이 말이 너무 어려우냐? 네가 스스로 알게 될 때는 이미 너무 늦을 터이므로 나는 그것을 염려한다.
빌렘은 그 말을 안중근에게 하지 않았다. 잉걸불이 사위어가고 있었다. 안중근은 화로 속의 재를 쑤셨다.
이 세상이 끝나는 먼 곳에서 빌렘이 기도를 드리고 있고, 그 반대쪽 먼 끝에서 이토가 흰 수염을 쓰다듬고 있고, 그 사이의 끝없는 벌판에 시체들이 가득 쌓여 있는 환영이 재 위에 떠올랐다. 시체들이 징검다리처럼 그 양극단을 연결시키고 있었다.
- 하얼빈, p. 66



도주막의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밤에, 안중근은 이토의 육신에 목숨이 붙어서 작동하고 있는 사태를 견딜 수 없어하는 자신의 마음이 견디기 힘들었다. 이토의 목숨을 죽여서 없앤다기보다는, 이토가 살아서 이 세상을 휘젓고 돌아다니지 않도록 이토의 존재를 소거하는 것이 자신의 마음이 가리키는 바라고 안중근은 생각했다.

...... 그러니, 그렇기 때문에, 이토를 죽여야 한다면 그 죽임의 목적은 살殺에 있지 않고, 이토의 작동을 멈추게 하려는 까닭을 말하려는 것에 있는데, 살 하지 않고 말을 한다면 세상은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것이고, 세상에 들리게 말을 하려면 살 하고 나서 말하는 수밖에 없을 터인데, 말은 혼자서 주절거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대고 알아들으라고 하는 것일진대, 그렇게 살 하고 나서 말했다 해서 말하려는 바가 이토의 세상에 들릴 것인지는 알기가 어려웠다.
- 하얼빈, p. 89






약지의 끝마디가 사라진 손의 인장으로 어릴 적부터 애국이란 단어의 표상으로 마음속에 자리한 인물, 안중근. 재판장에서 "포수, 무직, 담배팔이" 가장 하층의 삶이라 자신을 일컫는 그가 동아시아 판세를 바꾼 이토 히로부미의 저격을 하기까지의 시간을 밀도 있게 그려낸 소설이다.

강제적인 서구화의 물결 속에 우리 땅을 잠식해 가던 외세의 거침없는 침략 속에 소신을 갖고 목표를 향해 달려간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만나니 마음이 뜨거워진다.



어떤 이들에게는 테러리스트의 끔찍한 만행으로, 어떤 이들에게는 조국을 구원하기 위한 용감한 투쟁으로 기억되는 1909년 10월 26일을 앞둔 1주일부터의 시간을 밀도 있게 그려내는 소설에 빠져들었다. 앞서 인용한 소설 속 부분은 인물의 내적 갈등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으로 골랐다. 거사 직전까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을 그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한 구절이라 생각한다. 가슴에 7개의 별을 달고 태어났다고 해서 어릴 때 응칠이라 불렸던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에 대해선 소설에서는 거의 생략되어 있다.



그의 삶에 대한 소개는 아주 간략하다. 급변하던 세계사의 큰 흐름에 띄워진 배처럼 아주 작은 개인으로 잠시 스치듯 서술된다. 대신 거사 전의 그가 갖고 있던 고민, 고뇌, 그리고 가족들을 하얼빈까지 불러야만 했던 그의 거사 이후에 대한 가장으로서의 걱정이 자세히 등장한다.



갑신정변 이후 개화파에 대한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 청계동으로 가솔들을 이끌고 피난 온 아버지 안태훈 밑에서 어릴 적부터 뛰어난 문재와 더불어 무관의 능력을 보여주었던 안 의사. 15세 넘어서는 근방에 아무도 따라올 자 없는 포수로 이름을 날릴 정도였다고 한다. 19세에 천주교에 입교해 토마스(도마)라는 세례명을 받고 문중이 모여사는 청계동을 중심으로 황해도 지역에 교세 전파를 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아버지 사후 진남포로 이주한 그는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설립한다. 삼흥이란 토흥(土興), 민흥(民興), 국흥(國興)을 뜻하는데 국토와 국민이 흥해서 나라를 다시 일으키자란 뜻을 담고 있다. 또 천주교 신부가 운영하던 돈의 학교(敦義學校)를 인수해 황해도 일대에 이름난 명문학교로 키워낸다. 황해도의 60여 개 학교가 참여한 일종의 운동대회에서 돈의 학교가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문무 모두 겸비한 인재를 만들기 위해 헌신을 다한 그의 노력의 결실이라 생각한다.



이후 국채보상운동 참여해 가족들의 장신구 모두를 나라에 헌납하기도 했던 그는 고종 폐위 이후 일본의 군대해산으로 나라가 무력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을 하죠. 거기서 의병부대를 조직해서 여러 번 국내진격을 감행한다. 이때 그의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포로로 잡았던 나이 많은 일본군인들을 가엾게 여겨 석방했는데, 그들이 다시 일본군을 이끌고 자신들이 붙잡혀 있던 의병 주둔지를 습격하는 바람에 같이 있던 의병들이 흩어지고 한동안 다시 기병하지 못하고 그는 유랑생활을 하게 된다. 죄 없는 이들을 죽이는 일을 주저하고, 생명을 존중하던 그가 이토 히로부미에게 총구를 겨눌 수밖에 없었던 고뇌의 시간에 대해 더 깊이 몰두하게 만드는 일화가 아닐까 싶다. 1909년 1월(음력) 뜻을 같이하는 11명의 동지들과 함께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은 그는 거병이 당장은 불가능하지만 독립에 대한 뜻을 굽히지 않고, 나라에 목숨을 바칠 일을 하기로 맹세한다. 우리가 한 손의 약지 손가락 끝마디가 없는 인장을 보게 되는 것도 이 동맹 때문이다.






그는 진심으로 가열하게 달려간다. 쉼 없이 자신이 품은 뜻을 따라 노력하는 청년 안중근의 고뇌는 일상에 매몰되어 시끄러운 정치권 소식에 귀를 닫고 내 눈앞의 일들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나를 깨운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정말로 이기적인 안도의 한숨을 쉬게 만든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얼마나 다행인가! 이 얄팍한 소시민적 안도감과 동시에 인물에 대한 경외감으로 행적을 따라 행간을 달리는 시간이 감사하다.



살인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법정에 서겠노라 당당히 말하며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죄악 15개 조에 명석하고 논리적인 답변을 하며 그들의 동아시아 침략사를 준엄하게 비판한 안중근 의사, 뤼순감옥에서 사형당하기까지 옥고를 치르면서도 원고를 써 자신의 글을 남기고, 마음을 정갈히 하며 글자를 썼던 마음 자락 한 톨도 쉬이 따라가지 못할 것 같다. 애국, 애민. 그리고 신에 대한 헌신. 숭고한 마음결이 갖고 있는 깊이가 책 속에 오롯이 담겨 있다.





소설은 그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부록처럼 마지막에 그의 일가 후손들의 뒷 이야기가 첨부되어 있다. 같이 암살을 도모했던 우덕순, 동생들과 자식들. 그리고 그의 아내. 이토라는 탐욕의 열차를 멈추기 위해 방아쇠를 당긴 그로 인해 대한민국이란 땅에 설 자리가 없어진 이들의 혹독한 일생이 소개되어 있다. 너무 일찍 아버지를 잃어 그가 한 행동의 위엄을 배신하게 된 자녀들의 생에 대한 이야기를 보게 되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이토의 죽음 이후 그 사실이 대한민국 내에 알려지기를 꺼려했던 을사늑약 체결의 일등공신들, 그중 이완용은 만주까지 달려가 이토의 일가족을 위로하고 순종에게 위로금으로 10만 원(지금 시가 약 30억 원)을 지급하라 요구하고 실제로 지급이 되었다고 한다. 전재산을 구국활동에 힘썼던 안 씨 일가의 힘든 삶에는 어떤 누구도 귀 기울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지고 간, 남겨진 이들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란 무거운 짐까지 숨겨진 행간에서 찾게 되는 순간이었다.



힘차고 간결한 문체로 청년 안중근을 다시 이 세상에 불러낸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 함께 나누고 싶다. 모양은 다르지만 닮은꼴의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마음의 나침반이 되어줄 거라 믿기에 오늘 더욱 그를 간절하게 불러본다. 그처럼 당당하게 나를 이름 짓는 단어들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책을 닫는다.






기억하겠습니다. 당신을.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 같이 듣고 싶은 곡


드보르작 신세계 교향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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