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이제야 Oct 24. 2021

기반과 환경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다

#작은 일, 변화의 시작

​나는 남들보다 경제적으로든 자기계발적으로든 뒤쳐진 편이다. 타고난 면도 있겠고, 내 선택에 의한 결과이기도 하겠다. 건강한 환경과 건강한 선택에 관한 생각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괴롭든 말든,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어 괴롭든 말든, 좋아하는 밴드의 한정판 CD를 손에 넣지 못해 거의 매일 마음 한 켠에 그 사실을 담아 두고 속상해 하든 말든, 이렇게 태어나 자란 나로서는 다소 억울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현금 500을 하루라도 빨리 만들었어야, 그래서 그 난장판이었던 환경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났어야 더 빨리 안정감과 쓸데 없는 에너지 낭비를 줄이고 회사에서도 ‘괜찮지 않은 것에 괜찮은 척’ 하지 않을 수 있었을 거란 사실을 그때는 어렴풋이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시도하지 않았다. ‘과연 될까?’의 굴레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 나의 선택을 땅을 치며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때는 그게 나의 밸런스였다. 그때는 그렇게라도 해서 삶을 이어갈 시기였고, 지금은 지금대로 정신을 조금이라도 차려 또 다른 더 나아진 미래를 준비하는 시기인 것이다. 그냥, 조금만 더 빨리 깨달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정상성 바깥에서 나고 살아왔다고 해서 인생이 아주 망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욕심이 없지는 않은 사람이었고,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도 많았다. 뭘 해도 한심한 인간일 거라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은 해 보면서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공부든, 유학이든, 작은 사업이든, 살아있는 동안에는 뭐든 달성해 보는 거다. 이대로 죽어 버리기에는 못 해본 게 너무 많다. 이 또한 최애의 한정판 CD를 꼭 갖고 싶은 마음과 결이 같다고 할 수 있다. 일찍부터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누구에게도 혼나지 않고 살아온 나는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야 하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밤을 새서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20대가 지나서인지 아니면 정신 건강의 문제인지, 이제는 그렇게까지 몰두 하는 게 무척 힘들어졌지만 아직도 그때의 그 기질은 여전한 것 같다. 30대의 욕심은 장기전이다. 이제는 당장 가질 수 있는 한정판 앨범보다는 경매로 집을 사서 에어비앤비를 돌리고 싶다는, 지금의 내 여건으로 보면 사람들이 코웃음 칠만한, 두 시간 동안 만리장성을 완공하고 오후 두 시부터 오후 네 시 까지 팔만대장경 집필을 완료한다는 식의 시간감각도 경제감각도 말이 안 되는 인팁형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


목표와 경험에 대한 생각은  막연한 채로 부유하다 사라진다.​ 동경하던 사람들이 살아왔을, 노력했을  과정들을 상상한다.   과정을 아주 조금이라도 닮고 싶다.

하지만 용기는 좀처럼 내기가 쉽지 않고, 아이디어와 자료들은 아무리 모으고 분류해봐도 큰 그림은 보이지 않는다. 실행은 막막하기만 하다. 투두리스트가 너무 많아서였을까.


회사를 다니던 시절의 누군가는 나에게 꾸짖듯 조언했다. ‘다 핑계예요. 그 시간에 뭐라도 했으면 하나는 했겠네요?’ 맞는 말이었지만, 상처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게 됐으면….


그렇게 한동안의 시간을 보내다 보니 이번에는 다른 극단으로 치우친다. 매사에 간절함이 어느 정도는 남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점점 그 반대가 되어 일상에과 계획에 점점 디테일이 줄어들었다.​​​


이제와서야 내 여건에서는 어느 부분에 집중해야 했을지 깨닫기 시작했다. 아직은 거의 대부분이 계획 단계에 있고, 느릿느릿하다.


누군가는 자기계발을 하고 공부를 할 에너지를 사용하는 동안 나는 그 에너지로 그들이 이미 속한 기반이 되어 주는 환경을 만드는 일부터 해야 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도 공부를 하고 싶고, 자기계발을 하고 싶고, 몇 년 후의 프론티어에 도달하고 싶었다. 나는 망설이는 태도에 비해서는 의외로 프론티어를 달성하는 일에 곧잘 몰두하며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고 방향을 정하는 일을 편하게 느꼈는데, 어른들로부터의 관리를 덜 받은 유년 시절을 보낸 의외의 장점이었다. 최선을 다 해 내가 원하는 결과물을 얻어내고 원하는 성과를 보고야 마는 그 순간의 감정에 거의 중독되어 있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해결이 된다? 대신 그 과정에 내게 큰 체념을 요구하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그게, 당장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최적화 되어 있어 막상 여건이 주어져도 도통 활용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나에게는 돈을 모으는 일이 어렵게 느껴졌었다. 당장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정말로,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다음 달은 나아지겠지’의 ‘다음달은 영영 오지 않았던 시절을 보내면서 ‘이번 달’만을 살았다.


그러다 꼭 해결하고 싶은 일이 생겨 시작했더니 의외로 쉽게 되었던 일이, 현금 500만원 만들기였다. 이사를 해야 한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해야만 했던 일이었지만 지금은 동생이 제 밥벌이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번 돈으로 두 입이 먹고 살아야 하는 상황도 아니며, 외주도 그럭저럭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돈 관리를 잘 한다면 당장 큰일이 나거나 저녁을 굶거나 내일의 배고픔을 걱정해야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서야 이게 그렇게 힘든 일인 것만은 아니었으며, 돈을 모을 정도로 내가 사는 환경이 많이 호전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 경험은 어쩐지 내 뇌의 일부분을 바꿔 놓은 느낌이 들 정도로 큰 이벤트가 되었다.

돈을 한 번 모아 보니 돈이 없는 삶이 불안하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체감했다. 나에게 돈은 원래 없는 것이었다. 돈이 없는 일상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 돈이 없으니까, 앞으로도 돈이 없어서 큰일 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일상이 늘 큰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기반을 이렇게나 단시간에 (나는 6개월이 걸렸다) 이렇게나 생각보다 덜 힘들게 만들 수 있었다고?

이사 후, 그리고 다치는 바람에 남아 있던 돈을 몇 개월에 걸쳐 다 털고난 후, 나는 빠른 속도로 다시 50, 70, 100, 200, 80, 40…. 계속해서 항아리에 쌀을 채워 넣고 밥을 지어 먹듯 살았다. 빠르게 모은 대신 정산이 없을 때는 빠른 속도로 소진하기도 했다. 그래도 전처럼 돈이 없는 상태에 이상하리만치 익숙하거나, 또 너무 심각하게 불안해 하지는 않게 되었다.

어떻게 정리를 해도 자꾸 흩어지고 끊어져서 지속할 환경을 만들기 위해 계속 무언가 시도는 해 보는 중이다. 제대로 된 가계부는 아직 쓰지 못하고 있지만 아이패드에 넘버스 앱을 설치해 예정된 정산 건과 현재 남은 돈, 지출해야 할 돈 정도만 기록해 놓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하찮은 일부터 엉성하게하도 해야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인 것 같다. 여기서 이제 필요한 건 이런 나에게 한심하다, 진작에 뭐라도 했으면 뭐라도 됐겠다—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등에 업고 가는 것이다. 뮤트는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사과를 떠올리지 마세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사과가 떠오르는 것과 같달까.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나 실제로 듣지 않은 말에 영향을 받고 상처 받아 풀이 죽은 채로 멈추면 내가 원하는 바를 더더욱 이루기 힘들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더 깊은 우울의 하강나선에 빠져 다시 빠져 나오기 힘들어진다는 사실을 안다. 조롱의 말과 한심하다는 듯한 시선에 기분 나빠 하더라도, 동시에 멈추지 말자. 안 하는 것보다는 하는 게 낫다. 100% 한심한 사람이라는 자각보다는 90%만 한심한, 그러니까 10%는 덜 한심한 사람이 되는 게 그나마 나았다.


과거의 나처럼,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스스로에게 기대가 없고, 거의 포기 상태였던 사람들이 단 1%라도 자신이 자신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게 되어 조금이라도 편안해지고, 조금이라도 만족스러운, 남들은 됐고 자신이라도 만족스러운 일상을 살게 되었으면 좋겠다.  


억울하지만 핸디캡을 가지고 태어났어도 사회는 그것을 너그럽게 용인해 주지 않는다. 하지만 체념한 채로 적응하기도 싫다. 조금 나쁘게 말하자면 타고나지 못한 정상성을 채울 다른 무언가가 필요했다. 늦었지만 유학을 꿈꾸기, 늦었지만 해외에서 일 해보기, 사회적으로는 늦었지만 나는 아직 경험해 보지 않은 것, 죽기 전까지 할 수 있는 일은 해 보자. 핸디캡은 핸디캡이고,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에 집중해 보는 것이다. 하고 싶은 일을 방해하는 요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는 환경을 만들거나, 플랜B, C, D… Z까지 우회하는 계획으로 시도 해 보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번역 테스트를 빨리 보냈어야 했는데 너무 신중하게 하다가 3일을 보냈고, 결국 그 일은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놀란 마음은 그 마음대로 지나가도록 충분히 시간을 주고, 다음을 기다린다.

이전 07화 엄마 밥, 아빠 차, 이러쿵 저러쿵 네트워크가 없는 삶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