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날들
회사를 다니며 들었던 말들을 신경쓰지 않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는 걸, 퇴사 직후에 깨달았다. (‘마음속 목소리’ 참고)
동생이 출근한 텅 빈 방에서 혼자 일을 하는 동안 마음속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나무>에 나오는 뇌만 남은 사람처럼, 생각에 무한하게 빠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수익을 더 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며 내 사이트를 리뉴얼할 때도, 명함을 만들 때도, 해외 잡을 구해 보기 위해 하찮은 공부라도 하고 조악하게나마 커버레터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회사를 다니며 직간접적으로 들어왔던 말들이 지금의 상황에 맞게 각색되어 맴돌았다. 그 목소리는 점점 진짜 목소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를 향한 말들은 아니었지만, 내 주변을 스쳐 그 자리에 없었던 누군가, 서비스에 동원하고 있었던 작가, 씩씩한 행보를 보였던 타사의 직원이나 담당자, 대표를 향했던 조롱의 말들은 곁에 있는 사람들도 서서히 갉아 먹는다. 조금만 삐끗하면 나도 그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순간 부터 멘탈은 부식되기 시작한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나는 나를 비껴가는 말 틈 사이에서 살아남았다고, 나는 상처입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이미 깔려 버린 조롱의 말들로부터 고통받지 않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등에 업고 가는 요령을 어느 정도는 터득하게 되었다. 이것도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방법이다. 그냥, ‘어차피 나는 한심하니까 뭘 하든 내버려 둬!’하는 마음으로 살아 버리는 것이다.
내가 뭘 하든 조롱하고 욕 할 사람들을 생각하느라 하고 싶은 일을 전개하지 못한다는 상태가 갑자기 억울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역시 나는 못났으니까, 못난 작업이라도 하고 싶은 작업은 다 해 볼래. 진짜, 이젠 모르겠다. 어차피 망한 인생이잖아. 영 쪽팔리면 세상 하직하면 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자 참 우습게도,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약간의 의지가 생겼다. 사는 동안에는 뭐든 해 보고 싶어졌다.
그러는 사이에도 나는 여전히 아이엘츠 점수가 없었고, JLPT N2도 따지 못했고, 쥐고 있는 현금은 여전히 쥐꼬리만하며 그나마 들고 있던 테슬라 주식과 애플 주식은 이사를 하며, 카메라를 산다며 주가가 오르기가 무섭게 팔아 치웠다. 나는 외환이나 주식을, 머리를 써야 해서 그렇지, 꽤 쓸만한 저금통처럼 생각해서 개인적으로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역시 조롱의 말이 두렵다. 아, 정말 다들 무슨 상관일까. 아직 듣지도 않은 말에 짜증이 났다.
아이엘츠와 유학에 대한 ‘생각’만 하는 사이에 외국 클라이언트와 일을 할 기회가 생겨 몇 번 일을 진행하게 되었다. 구글 번역기와 사전이 없으면 작문도 제대로 못 하는 나였고, 마음속에서는 언젠가 들었던 ‘To 부정사도 다 틀리더라고요’ ‘옆테이블 영어로 말하는데 문법이 엉망이네?’ 따위의 말이 떠올랐다. 모두 나를 향한 말이 아니었지만 영어를 잘 못 하는 나는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 자체에 감탄하고 있었기 때문에 감탄하는 내가 이상한 것일까 생각했다. 내 문법 또한 엉망일 것이다. 하지만 창피함을 꿀꺽 삼킨다. 일을 어떻게든 해내는 게 더 중요하다. 보니 내 눈에는 환율이 오른 사이에 들어온 정산 금액만이 보였다. 아, 이렇게도 일이 되네?
이렇게 나는 아주 사소한 계기로, 마음속 목소리를 등에 업고 그러든지 말든지 내 일을 하는 연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일단 내가 돈을 벌고, 먹고만 살 수 있으면 된 거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