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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제야 Oct 24. 2021

마음속 목소리

#불안한 날들

(진짜로 귓가에 환청이 들린다는 의미는 아님을, 미리 알림)


나는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별 것도 아닌 이유로, 자신이 늘 하던 것, 먹던 것과 다른 것들을 보고 그렇게나 쉽게 조롱을 하며 사는 줄은 몰랐다. 천성이 상대방과 내가 다르면 ‘넌 그래? 난 이런데.’ 하며 따로 놀기를 좋아했고, 그런 일에 이상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탈리아 사람이 멸치액젓을 바게트에 떨어트려 먹든 말든, 호주 사람이 김치랍시고 배추를 불에 구워 숨을 죽인 후 된장에 버무려도(맛있겠다) 엉뚱한 것에 조롱하는 마음은 들지 않았다. 다른 것은 새롭고 즐거운 것들이었다. 외국에 가서도 새로운 음식을 먹어 보는 일을 즐겼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러면 모기 눈알 수프도 먹어 보세요. 도전하는 일이 즐겁다면서요’라며 조롱하기도 했다.


인터넷에 그런 댓글을 즐겨 다는 사람에 한정된 사례일 줄 알았는데, 회사를 다니면서는 미팅하러 온 창작자가 콘텐츠 제공에 대한 돈을 요구했다며 비아냥 거리는 등, 충격 받을 일이, 그렇게나 잦을 줄 몰랐다. 자취하는 신입 사원이 김치볶음밥을 미리 만들어 얼려 두고 먹으면 편하다는 말에 몸서리 치며 ‘어우, 처절해’라던 말도, ‘그 출판사는 돈을 처발라서 책 내는 거다. 그렇게는 누가 못 하냐’는 말도, 2만원짜리 작은 밥솥에 대한 글에 ‘저런 건 오래 못 쓴다. 왜 사냐. 나는 튼튼하고 아름다운 프랑스 제품만 쓴다’는 댓글도, ‘그 버터는 그렇게 고급진 것도 아니다. 취향이 너무 구려서 화가 난다’는 글도, 이해할 수 없었다. 모두 진짜로 존재하는 사람들의 입에서, 손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무섭기까지 했다. 나는 어떤 모자람이나 어떤 특징으로 저렇게 조롱을 당할까? 다음은 내 차례일 것 같았다. 나는 왜 이렇게 모자람이 많은 사람일까. 왜 이런 것들이 전부 흉이 되기도 하는 걸까. 나는 취향도 구리고 시야도 좁고, 실행력도 약하다. 다 내 노력의 문제겠지.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


회사를 다니면서도 어떤 상태에 완벽하게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을 한심하게 여기고 조롱하는 글과 말을 자주 읽고 자주 들어왔다.

그런 말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무의식 속에 차곡차곡 쌓였고, 마지막으로 다녔던 회사를 퇴사한 후, 프리랜서로 전향해 일을 하는 그것들은 마음속 목소리가 되어 내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걸림돌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되겠어?”

“그 나이 먹고 집이 왜 그래?”

“현금 500만원이 없어? ㅁㅁ씨 실망이다.”

“30대 넘어서 돈 없는 건 다 스스로의 탓이지. 한심해, 그런 사람들.”

“취향이 너무 구리다.”

“설마 그런 거에 만족해 하는 거야?”

“비즈니스 그렇게 하면 안 돼.”

“들어오는 일은 거절하면 안 돼. 다 받아야지!”

“넌 잘못 하고 있는 거야.”

“넌 절대 졸업 못한다. ㅋㅋ”


사람들은 안타깝다고 하면서 조롱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또 어떤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들은 조롱 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무언가를 하거나 하지 않는 상태는 그 사람이 어떤 부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정도의 어떤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두고 스스로를 책임지지 않는 무감각하고 미래에 대한 대비가 없는 한심한 인간이라는 조롱을 갖다 붙인다. 어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일단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 다음 프런티어는 살고자 하는 의지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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