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 아빠가 내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어렵다. 아빠가 내게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어느 날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 아빠를 미워해야 하는지.
가정을 떠나야만 했던 아빠의 마음을 이해해야 하는지.
나를 위해서 살고 싶다는 아빠의 사랑에 감사해야 하는지.
내 기억 속 아빠는 딸이라면 껌뻑 죽었다. 무서울 때도 있었다. 내가 곁에 없으면 정말로 무너져 버릴까 봐 걱정됐다. 어릴 때는 아빠가 얼마나 단단한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내 기억 속 아빠는 고개를 숙이고, 자주 눈물을 삼켰으니까.
할머니가 위독하셨다. 아빠 나이 마흔하나의 일이었다. 동생과 내가 모두 잠든 밤, 엄마와 아빠는 조촐한 술상을 차려놓고 어른의 이야기를 나눴다. 문득 잠에서 깨, 방 안에 동생과 나뿐이라는 걸 깨달은 밤이면 잠이 다시 오지 않았다. 방음이 잘되지 않는 문 앞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숨소리조차 내기 조심스러웠다.
‘나도 힘이 되어주고 싶은데.’
한참을 고민하다 문을 열었다. 거실에는 차분한 공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엄마는 심각한 표정이었고, 아빠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둘 다 애써 아무 일 없는 척 나를 보고 웃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아직 아무에게도 위로가 되어줄 수 없는 어린아이라는 것을.
결국,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나에겐 할머니여서, 할머니가 아빠의 엄마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아빠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그리고 십 년 뒤, 아빠는 할아버지마저 떠나보내야 했다. 나이 오십에 부모 모두를 떠나보내야 했던 아빠의 세상이 무너져버린 건 아닐까. 걱정조차 쉽게 할 수 없었다. 물어도 돌아오는 건 괜찮다는 말일 테니. 걱정 한 줌 뱉어보지도 못하고 입을 다문다. 미처 다 헤아리기 어려운 마음에, 어설픈 위로 대신 성숙한 딸이 되어본다.
시간이 자꾸만 흐른다. 아빠와 보낸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다. 아빠는 내가 커가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지 못했음을 늘 미안해했다. 내가 스무 살쯤이 될 때까지도, 아빠는 미안함 속에서 살았다. 술에 취해서야 진심을 꺼내놓는 목소리에는 후회와 아쉬움, 미안함이 가득했다. 뭐가 미안하냐고,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과거의 어떤 날처럼 또 고개를 푹 숙이고 울음을 삼키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앞섰다. 수화기 너머,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있을지 모를 아빠를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나 잘 크고 있으니까 괜찮아.
사실, 정말 괜찮은 건 아니었다. 그래도 아빠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그저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그 사이에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없었을 뿐이다. 어쩌면 다행이다. 아빠와 나는 싸울 일이 없다. 오히려 엄마보다 아빠랑 다정하게 지낼 수 있는 건, 같이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로의 못난 모습을 보여줄 일이 적었다. 그러다 보니 함께한 좋은 추억이 먼저 떠오른다. 텔레비전에 나온 딸기를 보고 맛있겠다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갑자기 외투를 챙겨 입고 나가 봉지 가득 딸기를 들고 돌아온 아빠를 생각한다. 문 앞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몰래 숨기다가 “아빠 뭐 해?” 한마디에 들켜버렸다며 멋쩍게 웃던 미소를 기억한다. 이번 주말엔 대청소도 하고, 가족회의도 하자며 손을 맞잡고 언덕 위 집으로 함께 올라가던 시간이 분명 존재했음을 안다. 다른 추억도 많을 텐데, 이제는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또렷이 남아있는 이 순간들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기를 바라며, 마음에 또 새기고 새긴다.
이런 추억들이 먼저 떠오르기 때문일까. 나는 아빠를 미워할 수 없다. 집에는 엄마와 동생, 내가 늘 함께 있었지만, 집을 나간 아빠는 내내 혼자였다. 스스로 한 선택이지만 자식들을 두고 나간 아빠의 마음이 마냥 편하지 않았음을 이해한다. 늘 미안함이 묻어있던 목소리에 차마 다 전하지 못한 말이 얼마나 많이 숨어있을지 생각해 본다. 아빠를 먼발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건, 짐작뿐이다.
오래 짐작만 하다 보니, 결심이 생겼다.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유일한 아빠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다짐이 무색하지만 사실, 이제는 안다. 아빠가 단단한 사람이라는 걸. 몇 번이고 삶의 고비를 맞았을 때에도, 지켜보는 내가 더 걱정될 만큼 힘겨운 순간에도 아빠는 끝내 버텨냈다. 아빠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니, 무너지더라도 몇 번이고 다시 일어날 힘이 있는 사람이다. 가끔 사는 게 팍팍할 때 아빠를 떠올리면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저절로 드니까. 아빠의 단단함을 닮고 싶다.
이미 단단한 사람이지만, 아빠 편이 되어주는 일은 여전히 내 몫이다. 무조건적인 내 편이 있다는 게 가끔은 큰 위로가 되어주기도 할 테니. 아빠가 내게 어떤 존재인지 이제야 알겠다.
함께 행복하고 싶은 사람.
더 나은 삶을 살고 싶게 하는 사람.
미워하고, 이해하고, 감사한 마음을 따라가다 보니
아빠는 언제나 나의 기둥이었다.
지안
사람과 사랑을 탐구하며 <우리는, 사랑으로>라는 중제목 아래 여섯 편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
공간 사계절에 모인 다섯 작가가 귀촌·여행·책방·음식·관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5인 5색 에세이집입니다.
본 도서에서 재미와 감동, 따듯한 통찰이 담긴 다른 챕터들도 함께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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