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온도

스물셋 겨울, 나는 화병을 얻었다.

by 지안
Pont Neuf, Paris (1872) | Pierre-Auguste Renoir


“화병입니다.”


스물셋 겨울, 나는 화병을 얻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제멋대로 뛰었다. 길을 걷다가도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었다. 갑자기 엉엉 울어버리고 싶어지는 날들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딘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정상적인 사고가 어려웠다. 혹시 머리 문제인가 싶어, 뇌 검사를 받으러 갔다. 진료실 안 침대에 누웠다. 본격적인 검사가 시작되기 전, 몇 가지 질문을 받았다.


“혹시 최근에 스트레스받는 일 있으셨어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어떤 병원에 가도 쉽게 들을 수 있는 간단한 질문이었는데, 이번에는 답을 할 수가 없었다. 목이 메어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안부를 묻는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다정했다. 갑자기 눈물을 쏟는 나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른 병원에 가보기를 조심스럽게 권했다. 그제야 나도 받아들였다. 내가 아픈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걸. 내가 가야 하는 곳은 뇌신경과도, 심장내과도, 정형외과도 아니었다.


스물둘, 고향을 떠나 낯선 도시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평소 관심 있던 분야의 실무를 경험할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사하기 전에 친해진 사람은 둘. 그 외에 아무 연고도 없었다. 말투, 문화, 사람들까지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 그곳이 좋았다.


무엇보다 내가 좋아한 건 사람들이었다. 함께 일하는 선배들이 좋았다. 그들과 보낸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다. 평일의 대부분을 함께했고, 필요하면 주말에도 일로 만났다. 가끔 일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놀고 싶기도 했지만, 내가 따로 만나자고 한 적은 거의 없었다. 타지에서 온 나를 그저 챙겨줘야만 하는 어린 후배로 보지 않기를 바랐다. 그들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 건 내가 아니었다. 가족, 친구, 연인을 만나기에 쉬는 날이 턱없이 부족했으니까. 아무리 나이가 비슷하고,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더라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일을 함께하는 사이였다. 모두가 알았다. 우리 사이엔 늘, 적당한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걸.


하지만 제2의 고향이 되어버린 도시에서, 나에게는 그들이 전부였다. 온 마음을 쏟았다. 그들도 나를 알뜰살뜰 챙겨주었지만, 그럴수록 내 마음은 더 커졌다. 마음의 크기를 조절하지 못했다. 그들이 건넨 마음보다, 내가 돌려준 마음이 더 컸다. 그 마음의 크기가 누군가에게는 부담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사랑은 타이밍이라던데, 그조차도 맞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힘듦에 지쳐 서로를 챙기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살얼음 위를 걷듯 조심스레 관계를 이어갔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였지만,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사이가 되었다.


1년을 살짝 못 채우고 고향에 돌아왔다. 휴학을 마무리 짓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했다. 익숙한 환경에 돌아오면 괜찮아질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친구랑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과제를 하다가도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후회와 아쉬움으로 머릿속이 늘 시끄러웠다. 어떤 관계도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돌아온 대가였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는 마음의 온도가 달랐다. 관계라는 것은, 마음의 온도가 맞아야 이어갈 수 있는 거였다. 내가 조금 더 성숙했다면 지금이랑 달랐을까. 아무리 아쉬워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대로는 제정신으로 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나아가야 했다. 정신건강의학과에 찾아갔다. 화병 진단을 받았다. 말하고 싶은 걸 다 말하지 못해 생긴 병이었다. 내가 말하지 못한 건, 사랑이었다.


새롭게 생긴 소중한 관계를 지키는 방법을 몰랐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 가까운 사람들의 마음을 감당하는 일도 버거웠다. 새로운 관계에서도, 가족 관계에서도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도망친대도 머무를 곳이 없었다. 친하다고 생각한 사람과도 마음의 온도가 다르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내가 그토록 외쳤던 건 사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미숙했다.


어려서부터 사람을 좋아했다. 그들이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한 사람의 생애를 담은 글과 영상을 보는 것도 좋았다.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면, 어느새 그들의 행복을 바라게 되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내게 어렵지 않았다. 시선이 머무는 끝에는 늘 사랑이 있었다.


사랑이 학문이라면 내 성적은 B-다. 학습에 열의가 있으나, 배운 걸 자꾸 까먹는 학생. 평생 배워야 할 학문이 있다면 그건 사랑일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오래도록 사랑을 탐구하는 학생이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달은 게 있다.


사랑을 말하고 싶다면 보답을 바라지 않아야 한다는 것,

한쪽만 뜨거운 사랑은 부담이 될 수 있다는 것,

적당한 거리에서 마음의 온도가 비슷해질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사랑을 배우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그래도 이제는 두렵지 않다. 서툴지만, 배운 걸 조금씩 실천하고 있다. 이제는 마음을 너무 내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한 걸음 물러선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린다.


마음의 온도가 비슷할 때까지, 언제까지라도.





지안

사람과 사랑을 탐구하며 <우리는, 사랑으로>라는 중제목 아래 여섯 편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

공간 사계절에 모인 다섯 작가가 귀촌·여행·책방·음식·관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5인 5색 에세이집입니다.

본 도서에서 재미와 감동, 따듯한 통찰이 담긴 다른 챕터들도 함께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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