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평생토록 이 마음을 말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아껴두려고 해.”
내 말에 그는 한참 웃었다. 같은 생각을 했다는 뜻이다. 사랑을 쉽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이 정말로 필요해질 순간을 위해 아껴두고 싶었다. 비슷한 속도로 마음을 표현하고, 말 한마디에도 무게와 진심을 담고 싶어 하는 사람. 그런 마음이 닮은 사람을 만났다.
사랑을 말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 툭 건드리면 입 밖으로 새어 나올 것 같아서 꾹 참았다. 그가 내 마음을 부담스러워할까 봐 그런 건 아니었다. 그는 소중한 사람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늘 나를 바라봐주었으니까.
우리의 대화는 끝이 없었지만, 수많은 이야기 속에 ‘사랑해’라는 단어는 없었다. 진심을 꺼내 보이고 싶은 순간이면 서로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다 웃었다. 우리는 말 대신 눈빛으로, 웃음으로 마음을 주고받았다.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감정이 온전히 전해지는 순간이 소중했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그와 조금이라도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서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다. 가만히 있다가도 눈물이 나고 머릿속이 늘 시끄럽던 날들이, 그와 연애를 시작하고부터 웃음과 행복으로 채워졌다. 마음이 아파 처방받았던 약도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사랑은 사랑으로 치유된다는 말은 진짜였다.
그와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건 아니었다. 알고 지낸 지 일 년이 지나서야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는 타지에서 온 나를 늘 부담스럽지 않게 챙겨줬다. 주변 사람을 잘 챙기고, 남을 돕는 데 자신의 시간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애쓰는 방향이 나와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에겐 쉽지 않은 일들을 가볍게 해냈다. 사람과의 거리를 조절할 줄 알았고, 다양한 일을 즐기면서 해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를 닮고 싶다는 마음이 자주 들었다.
내가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우리는 연락을 이어갔다. 때로는 일로, 때로는 사적으로. 어떤 주제든 상관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그에게 스며들고 말았다. 우리는 비슷한 속도로 마음의 온도를 맞춰가고 있었다.
어느 날 겨울, 우리는 함께 밥을 먹었다. 무슨 이야기든 편하게 들어주는 그에게 힘들었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는 그동안 본 적 없는 얼굴로 차분히 들어줬다. 꺼내기 힘든 이야기를 해줘서 고맙다며 말하는 그는 부러진 젓가락을 하나 보여줬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화가 나 쥐고 있던 젓가락을 그만 부러트리고 말았다며 멋쩍게 웃었다. 내 이야기에 이렇게 공감해 주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너를 오랫동안, 그리고 많이 좋아할 것 같아.”
그가 조심스럽게 마음을 전했다.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겨울날, 그렇게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아낌없이 마음을 내어주는 그의 앞에서, 나는 조금씩 투명해졌다. 애써 감추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래도록 속으로 삼켰던 사랑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비슷한 온도를 지닌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고서야, 나는 자유를 만났다.
“사랑해.”
아껴둔 말을 그가 먼저 꺼내놓았다.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한마디에 사랑이 더 선명해졌다. 말하지 않아도 느껴졌던 진심이, 그 말을 통해 더욱 단단해졌다. 그의 모든 행동이 같은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일상이 되면서, 매 순간 뜨거울 수는 없었다. 마주치는 시선마다 처음과 같은 애정을 담는 일은 어렵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그의 눈빛이 예전보다 덜 반짝인다고 느껴지면, 나도 모르게 불안해졌다.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 관계는 오래 이어질 수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너무 행복했던 탓일까. 매일 처음처럼 뜨거운 상태로 머물고 싶은 욕심이 자꾸 들었다. 욕심은 결국 서운함으로 번졌다.
서운함을 몇 번 전하고 나서야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나 역시 모든 순간에 처음과 같은 애정을 담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느꼈을 텐데, 그는 나와 달랐다. 나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받아들였다.
욕심을 내려놓았다.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사랑은 시간이 흐르며 모양이 자연스럽게 바뀐다는 걸. 오래 함께하려면 열정은 안정이 되어야 한다는 걸. 비슷한 온도를 가진 사람을 만났지만, 그 온도를 유지하는 일은 또 다른 일이었다. 온도는 변화에 민감해서 자주 살펴보고 맞춰야 했다.
서로의 곁을 지켜 온 시간이 어느덧 오 년이 되었다. 처음과 같은 열정은 아니지만, 우리의 관계는 늘 따뜻하다. 그는 여전히 사랑한다는 말 없이도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내 몫의 요리는 늘 본인 것보다 예쁘게 담아 준비해 준다. 허리가 안 좋은 나를 위해 언제 어디서든 편한 의자를 내어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나일 수 있도록, 한 발짝 뒤에서 묵묵히 기다려준다. 그의 다정함이 일상에 스며들었다. 그의 곁에서 나는 조금씩 더 나다워졌다. 마음이 닮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건, 서로를 바꾸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이었다.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평생토록 이 마음을 말하고 싶다. 내가 가진 가장 예쁜 말을 골라 들려주고 싶다. 함께하는 시간을 웃음과 행복으로 채워주고 싶다. 그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 것처럼, 나도 그가 그의 모습으로 머물 수 있도록 곁에 있어 주고 싶다.
그와 함께하면서 알게 되었다.
사랑은 비슷해진 마음의 온도를 함께 지켜가는 일이라는 걸.
어쩌면 내가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건, 이런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안
사람과 사랑을 탐구하며 <우리는, 사랑으로>라는 중제목 아래 여섯 편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
공간 사계절에 모인 다섯 작가가 귀촌·여행·책방·음식·관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5인 5색 에세이집입니다.
본 도서에서 재미와 감동, 따듯한 통찰이 담긴 다른 챕터들도 함께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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