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버텨내고, 성장한다.
느티나무가 되고 싶었다.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수백 년, 때로는 천년 가까이 끄떡없이 자라는 느티나무. 혹독한 겨울과 강한 바람에도 잘 버텨내는 단단함이 부러웠다. 여름이면 사람들을 품어주는 넓은 그늘을 만드는 느티나무가 좋았다. 비와 더위를 가려주는 풍성한 나뭇잎이 멋있었다. 닮고 싶고, 든든한 존재. 나에게 나무가 그랬다.
어린 시절 나에게 그런 존재는 선생님이었다. 학교에서 만난 선생님들은 언제나 든든했다. 아이들에게 온 마음을 기울이고, 학생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주고, 미래를 함께 고민해 주는 어른들이었다. 동경은 곧 꿈이 되었다.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장단점을 살피고, 바른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주는 일.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다며 뒤에서 응원과 지지를 아끼지 않는 일. 선생님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동경했던 선생님의 모습이 될 자신이 없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부반장을 맡아보니 알 수 있었다. 서른 명의 아이를 챙기는 건 마음이 단단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나는 늘 마음 한구석이 무거웠다. 내가 두루 챙기지 못하면 소외감을 느끼는 친구들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남을 챙기는 일에 애를 쓰면서도, 정작 내 마음을 돌보는 일에는 서툴렀다. 모두를 품고 싶었지만, 나 한 명조차 지키지 못하는 사람. 나는 욕심만 크고 마음은 약한 사람이었다.
학창 시절의 꿈은 어린 시절에 남겨두었다. 모두를 챙기기 전에 먼저, 나부터 돌볼 줄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꿈을 모두 버리기는 아쉬워, 한 조각을 떼어 마음에 품고 다짐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을 가진 사람이 되자고. 혼자서도 충분한 사람이 된 후에, 주변 사람들에게 든든한 존재가 되어주자고. 꿈을 잃은 줄 알았는데 오히려 선명해졌다. 내가 원한 건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아니라, 단단한 어른이 되는 일이었다. 결국 내가 바란 건, 나무를 닮은 사람이 되는 일이었다.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부반장, 부과대표처럼 뒤에서 돕는 역할에 머물던 내가, 앞에서 방향을 잡는 동아리 단장을 맡을 용기가 생겼으니까. 새로운 분야에서 일해보고 싶은 마음 하나로, 아무 연고도 없는 300km 떨어진 곳에 혼자 내려갔으니까. 나는 단단해지고 있다고, 예전보다 성장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뿌리가 깊지 않은 어린나무였다. 다 자라지 못한 가지는 예고 없이 불어온 강풍에 쉽게 휘어졌다. 오래 보고 싶었던 사람들과 더 이상 전처럼 지낼 수 없다는 사실은, 나에게 강한 바람이었다. 마음의 온도가 맞지 않았던 사람들과 조금씩 멀어지는 순간들이 힘들었다. 마음을 건네는 일이 무서워졌다. 나무가 되는 일을 포기하고 싶었다. 나는 나조차 지키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그러니 주변에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단정했다.
내 눈에 나는 늘 부족한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을 다 챙기려다 결국 누구 하나 제대로 챙기지 못하는 내 모습을 내가 이해하지 못했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어서, 부정적인 말 한마디에도 쉽게 흔들렸다. 그러면서도 어떤 기준을 세워야 하는지 알지 못해 자꾸 주변만 살폈다. 그래서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나는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잘 모르고 있었다. 나는 나를 사랑해서 스스로를 지키고 싶었던 거였다. 내가 나를 보호하지 않으면 모든 게 무너질까 두려워서, 도망가고 싶거나 강해지고 싶은 거였다.
흔들릴 때마다 곁을 내어주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몇 번이고 도망가는 나를 데려와 곁에 앉혀두었다. 내가 맛있게 먹었던 김치찌개를 끓여줄 테니 집에 놀러 오라거나, 눈물을 숨기지 못한 내 옆에서 함께 울어주거나, 같은 이야기를 몇 번이고 들어주면서 곁을 지켜주었다. 나는 나무가 되는 일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건강한 나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며 영양분을 나눠주고, 바람에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받침대를 놓아준 사람들 덕분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 시간을 견뎌낸 나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으로 살아가고, 버텨내고, 성장한다. 그 ‘누군가’에는 언제나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곁에 아무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나는 나를 사랑하고 있었고, 나를 지키고 있었다.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나는 왜 그렇게 오래 잊고 살았을까. 잠시 스쳐 지나간 인연일지라도, 그 순간만큼은 내게 필요한 햇빛이거나 나를 성장시킨 바람이었다.
나무는 궂은 비바람도, 따스한 햇볕도 가리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여야 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나도 다시 버텨보기로 했다. 비바람과 추위가 몇 번이고 찾아오더라도, 가지가 앙상해지고, 휘어서 자라게 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버텨내어 단단한 나무로 자라나고 싶다.
그 과정이 쉽지 않을 걸 알고 있다. 폭풍우가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다. 몰아치는 비바람에 흔들릴 때면, 내 그늘 아래에 있던 이들의 어깨가 젖을지도 모른다. 매서운 추위에 가지가 앙상해지고, 따사로운 햇살을 하염없이 기다리며 버텨야 하는 순간도 찾아올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제 나무가 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버텨야만 하는 날들이 있어야 비로소 단단한 느티나무가 될 수 있으니까. 처음 뿌리를 내리는 자리는 정해져 있지만, 어떤 모습으로 자라날지는 내가 결정할 수 있으니까. 춥고 어려운 계절이 길어지더라도 괜찮다. 다시 돌아오는 계절에 새순이 돋아 다시 푸르러질 것을 알기에, 나는 오늘도 다짐한다.
햇빛, 바람, 비, 추위, 그리고 시간.
나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온몸으로 받아낼 것이다.
스스로를 지키고 싶어 했던 나를 위해서,
곁을 지켜주었던 그들을 위해서.
나 그리고 우리는, 사랑으로 살아가기에.
지안
사람과 사랑을 탐구하며 <우리는, 사랑으로>라는 중제목 아래 여섯 편의 이야기를 썼습니다.
『무너지지 않는 사람』
공간 사계절에 모인 다섯 작가가 귀촌·여행·책방·음식·관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5인 5색 에세이집입니다.
본 도서에서 재미와 감동, 따듯한 통찰이 담긴 다른 챕터들도 함께 만나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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